비사성, 고구려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역사의 '국경'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국경' 여행 (2)

등록 2009.09.06 12:38수정 2009.09.0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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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 15분 정도만 지나면, 바다를 끼고 장엄하게 드러누워 있는 대련이 창밖으로 아득히 내려다보인다. 아니, 대련 시가지보다 먼저 봉추도(棒木追島)가 눈에 들어온다. 대련에서 불과 9km 떨어진 곳에 방망이 모양으로 붙어 있는 섬이라 하여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다.

 

'봉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의 군사(軍師)가 언뜻 생각난다. "와룡(제갈공명)과 봉추(방통) 중 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회자되던 그 유명한 방추 말이다. 방추는 일찍 전사한다.<삼국지연의> 를 읽으면서 독자들이 한결같이 안타까워하는 몇 대목 중 하나가 바로 그가 새파란 나이에 어이없이 죽는 그 장면이다. 그런데<삼국지>를 보면 방추는 전투를 직접 지휘하며 싸우고, 와룡은 언제나 뒤에서 지휘만 하지 위험에는 노출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뛰어난 인물일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맞붙어서 싸워본 적이 없으므로……. 어쨌거나, 봉추는 와룡에 비해 천운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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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추도 대련 앞바다에 떠 있는 봉추도. 중국 최고위급 인사들과 외국 귀빈들을 위한 국빈관이 있으며, 섬에 들어가려면 20위안의 입장료를 내어야 한다. 들어가보지는 못했고,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며 사진만 찍었다. ⓒ 정만진

▲ 봉추도 대련 앞바다에 떠 있는 봉추도. 중국 최고위급 인사들과 외국 귀빈들을 위한 국빈관이 있으며, 섬에 들어가려면 20위안의 입장료를 내어야 한다. 들어가보지는 못했고,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며 사진만 찍었다. ⓒ 정만진

다시 어쨌거나, 대련 앞바다의 봉추도는 방통[鳳雛]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자 글자도 다르다. 봉추도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자주 방문한 곳으로 이름이 높은데, 섬 안에는 국빈관이 있다고 한다. 주은래, 등소평, 유소기, 호요방, 강택민, 화국봉, 주덕 등 쟁쟁한 거물들이 머문 국빈관은 1961년에 완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그곳을 방문할 수는 없다. 애초부터 봉추도 방문은 우리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섬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20위안(약 4천원)의 입장료를 납부해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윽고 비행기가 대련 시가지 상공을 휘감아돈다. 인구가 600만 명을 넘는 대도시라더니 과연 온 사방이 건물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그런데 첫 느낌은 그리 상쾌하지가 못하다. 무슨 아파트가 저렇게 많담! 언젠가 신문에서 프랑스 청년학도가 한국인들이 왜 아파트를 그토록 선호하며, 그 속에 갇혀서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를 다룬 논문으로 자기네 나라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문화수준이 높은 서양인들에게는 거의 비호감이라는 아파트를 이곳 대련사람들도 저렇게 지어대는 것을 보면, 여기도 아파트 투기가 심한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다면, 인구는 20배가 되지 않지만 국토 면적은 우리나라(통일한국)에 비해 무려 50배나 되는 중국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닥지닥지 아파트를 지어놓고 거기 들어가서 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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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항 하늘에서 내려다 본 대련항. 인구 600만을 넘는 대도시다운 위풍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행기가 공항으로 다가갈수록 어마어마한 아파트 밀림들이 도시를 꽉 메우고 있어 찾아오는 이의 첫인상에 답답함을 안겨주는 도시이다. ⓒ 정만진

▲ 대련항 하늘에서 내려다 본 대련항. 인구 600만을 넘는 대도시다운 위풍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행기가 공항으로 다가갈수록 어마어마한 아파트 밀림들이 도시를 꽉 메우고 있어 찾아오는 이의 첫인상에 답답함을 안겨주는 도시이다. ⓒ 정만진

그러나 대련의 첫인상은 금세 산뜻하게 바뀌었다. 면적이 176만㎡나 되어 여의도광장의 약 5배나 되는,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큰 광장인 성해(星海)광장에서 목도한 거대한 '책' 덕분이었다. 대련시 100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책 모양의 거대한 조각이 바다를 향하여 활짝 펼쳐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어림잡아 수백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단한 군중들이 뛰어놀고, 기념촬영을 하고, 손을 맞잡은 채 즐거워하고 있었다.

 

우리 한국인들이 흔히 '만주'라고 부르는 중국의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연변조선족자치주(연길, 용정, 화룡, 도문, 혼춘, 돈화, 안도현, 백두산 등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함경북도와 러시아에 가로막혀 동해를 볼 수 없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를 보려면 가장 가까운 대련으로 와야 한다. 그 탓에 이곳 대련은 1년 동안 외국인은 100만 명 안팎이 방문하지만 내국인인 중국인 관광객은 무려 3천만 명이나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는 한반도 어디에 살더라도 대략 2시간 정도 달리면 동해, 서해, 남해 중 어디든 닿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멀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저들이 저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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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향해 펼쳐져 있는 거대한 '책' "이제 대련은 100년 역사를 맞이하여 새로운 장을 열었다, 새 역사가 펼쳐졌다!" 이런 뜻에서 상해광장 끝 바다와 맞붙은 곳에 어머어마한 책 조각을 건립한 대련시 관계자들의 문화적 인식이 돋보이는 멋진 관광 상품(?)이었다. ⓒ 정만진

▲ 바다를 향해 펼쳐져 있는 거대한 '책' "이제 대련은 100년 역사를 맞이하여 새로운 장을 열었다, 새 역사가 펼쳐졌다!" 이런 뜻에서 상해광장 끝 바다와 맞붙은 곳에 어머어마한 책 조각을 건립한 대련시 관계자들의 문화적 인식이 돋보이는 멋진 관광 상품(?)이었다. ⓒ 정만진

무수한 군중들이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많이 올라 환호작약하는 광경을 보노라니, 이 어마어마한 책 조각은 대련에서도 가장 눈부신 명소가 아닐까 여겨졌다. 거대한 책 조각이 등장하게 된 것은 도시 출발 100년을 맞이하면서 '대련의 새 역사를 펼쳐나가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으니, 대련시가 100년을 맞아 기념조각으로 거대한 책을 바닷가에 세운 것은 정말 뛰어난 지혜가 아니랴.

 

대구시교육청의 신축 건물이 생각났다. 대구시교육청은 이 고층건물을 신축하면서 규칙을 정하여 호언하기를 '전통미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나타낼 수 있도록 짓겠노라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 건물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러한 전통적 양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래에서 올려보나 멀리 떨어져서 쳐다보나, 방향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전통미는커녕 일반적 아름다움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 밋밋한 상자에 불과하다. 성해광장의 거대한 책에는 규모로나 아름다움으로나 내재된 의미로나 도무지 미칠 수 없는 성냥곽에 지나지 않는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고도 이런 건물밖에 짓지 못하는 곳이 대구광역시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이라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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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교육청 전통미가 돋보이도록 짓겠다고 했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주지 못하는 대구시교육청 건물에 인부들이 매달려 유리창 청소를 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광경. ⓒ 정만진

▲ 대구시교육청 전통미가 돋보이도록 짓겠다고 했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주지 못하는 대구시교육청 건물에 인부들이 매달려 유리창 청소를 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광경. ⓒ 정만진

 

그렇다고 성해광장에서 마냥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의 가장 높은 목적지, 고도만이 아니라 그 뜻으로도 최고의 방문 예정지인 비사성(卑沙城)으로 가야 한다. 차량은 금세 시가지를 벗어났고, 멀리 비사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사성을 중국 사람들은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이라 부른다. 대흑산(663.1m)에 있는 산성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백두산이라 부르는 것을 저들은 장백산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비사성은 고구려 때 축조된 성이지만,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비사성은 대흑산 가파른 절벽 위에 석회암을 드높여 쌓아 축조한 거대 석성(石城)으로, 실제 현장에 도착해서 하늘 끝까지 쳐다보면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만 서문(西門)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다(<삼국사기>권21 고구려본기 제9편)'는 기록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 그 자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천혜의 요새 비사성은 수·당이 바다를 건너오면 즉각 마주치는 지점에 있었으니, 수·당도 고구려를 공략하려면 자연스레 군사적 요충지인 비사성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언제나 전쟁은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서 그 어느 곳보다도 중요한 국경 지대였던 비사성은 조국 고구려가 수(隋)·당(唐)과 전쟁을 할 때마다 적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 역할을 감당해왔던 셈이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614년(영양왕 25) 7월(음력) 마지막으로 고구려를 침공해왔을 때에도, 고구려군은 하나뿐인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해 수나라 군대는 미미한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물러가고 말았다. 수는 결국 건국한 지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 고구려와 벌인 무모한 전쟁 탓이었고, 수를 물리치고 조국을 지켜낸 선봉장이 바로 비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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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성 사면 중 서쪽으로만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비사성. 과연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선 비사성의 위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올라가보고 싶다는 욕망에 들끓게 하였다. 나도 이런데, 옛날 먼 길을 달려 쳐들어온 수나라, 당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오죽하였을까. ⓒ 정만진

▲ 비사성 사면 중 서쪽으로만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비사성. 과연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선 비사성의 위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올라가보고 싶다는 욕망에 들끓게 하였다. 나도 이런데, 옛날 먼 길을 달려 쳐들어온 수나라, 당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오죽하였을까. ⓒ 정만진

세월이 흘러 다시 당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비사성에도 비극은 닥쳐왔다. 645년 4월, 당나라는 4만여 대규모 수로군으로 비사성을 공격한 뒤, 다음달 초 정예병으로 서문을 기습하였다. 중과부족이었던 고구려군은 결국 패하고, 퇴로가 없어 살아남은 8천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대패한 뒤 물러갔고, 비사성에서도 철수하였다. 당태종은 귀국 후 전쟁에서 다친 부상을 이기지 못해 곧 죽지만(649년),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爲中國諱恥)'를 역사 기록의 원칙으로 삼아온 중국 사필(史筆)의 전통에 따라 <당서> 또한 당태종의 사인을 애매하게 기록함으로써 스스로의 치욕을 덮으려 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아들에게 유언한다. "결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

 

비사성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대련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멀리 바다 위를 오가는 작은 배들까지도 어김없이 시야에 포착된다. 수·당의 수군이 전함을 몰고 쳐들어오는 것을 고구려 군사들이 못 볼 리 없고, 적들이 몰려와 성을 향해 진격할 때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좌우로 가파른 산세가 날을 세우고 서 있는 골짜기 한복판에 난 계곡길뿐이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양쪽에서 불화살을 날리고 기름에 절여 불붙인 나무둥치들을 굴릴 때 그들은 도무지 살아남을 재주가 있을 수 없어보였다. 게다가 성벽 바로앞까지 다가온다 한들 일부러 깎는다 해도 그렇게 날카롭게 벼리지는 못했을 것 같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터이다. 듣던 그대로 '역시 비사성은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요새로다!' 싶은 감탄이 저절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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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성에서 바라보는 대흑산 산정 풍경 온통 바위암벽으로 이루어져 저절로 천혜의 요새가 되어주었던 고구려 비사성이 위치하고 있던 대흑산 산정에는 지금 중국의 레이다 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비사성은 예나지금이나 여전히 국방적 의미가 뚜렷한 장소인 모양이다. ⓒ 정만진

▲ 비사성에서 바라보는 대흑산 산정 풍경 온통 바위암벽으로 이루어져 저절로 천혜의 요새가 되어주었던 고구려 비사성이 위치하고 있던 대흑산 산정에는 지금 중국의 레이다 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비사성은 예나지금이나 여전히 국방적 의미가 뚜렷한 장소인 모양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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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성 점장대에서 바라보는 대흑산 산정 방향의 풍경 ⓒ 정만진

비사성 점장대에서 바라보는 대흑산 산정 방향의 풍경 ⓒ 정만진

비사성, 고구려 때에는 국경의 시작점이었다. 수·당과 맞붙은 경계선 중에서도 땅으로서는 가장 서쪽, 그리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지키는 최선봉의 국경 지대였다.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고구려 영토의 출발 지점이었다. 비사성 점장대에 올라 저 아래로 굽어보이는 바다와 대련 시가지를 바라보노라니, 백령도에서 강원도 고성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휴전선이 국경이 아니라, 이곳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진정한 국경선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는 감회가 저절로 솟구쳐 올랐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만주벌판(저들은 '동북평원'이라 부른다)을 부지런히 '관광'한다. 혹자는 본디 우리땅이었던 곳을 부질없는 과거회귀적 역사관에 빠져 비싼 돈까지 만주벌판에 뿌려대며 돌아다닌다고 힐난하기도 하지만, 고구려 시대의 지나간 국경을 마음으로 안타까워하는 일이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사의 결정적 시기를 새로이 맞이하려는 염원의 발로일 수도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젖는다. 우리의 국경선은 백령도에서 고성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휴전선이 아니라 적어도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라야 한다는 당위를 남의 땅이 되어버린 비사성 성루에서 안타까이 되새겨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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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성에서 내려다보는 대련 시가지와 바다 비사성에서 바라보면 바다의 움직임과 대련 시가지의 동향이 한눈에 보인다. 고구려 군사들은 이곳에서 적들의 침입을 살피며 낮과 밤을 쉼없이 보냈으리라. ⓒ 정만진

▲ 비사성에서 내려다보는 대련 시가지와 바다 비사성에서 바라보면 바다의 움직임과 대련 시가지의 동향이 한눈에 보인다. 고구려 군사들은 이곳에서 적들의 침입을 살피며 낮과 밤을 쉼없이 보냈으리라. ⓒ 정만진

 

#비사성 #국경 #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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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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