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서울, 말은 제주도... 그래서 한국경제는 우파?"

'친기업·재벌' 논란 휩싸인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

등록 2009.09.14 18:53수정 2009.09.1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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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최경준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 ⓒ 최경준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은 '친(親)시장주의자'다.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한다. 그런데 정 위원장이 '친기업·재벌'을 지향하는지, '친서민·중소기업' 정책을 펴 나갈 것인지 여전히 모호하다.

 

취임 40여일이 지난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전임 위원장인 백용호 국세청장이 떠오른다. '규제 완화'와 '시장경제 옹호'라는 명분 아래 공정 경쟁 확립이 아닌 대기업 편향 정책을 펼 가능성이 크다는 시민단체의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헌법 위에 경제헌법?

 

"바람직한 한국 시장경제 모형은 무엇입니까?"

 

정호열 위원장이 14일 열린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꺼내 든 첫 화두다. 정 위원장은 지난 7월말 취임 당시 기자들에게 "이제 교수가 아닌 기관장으로서 말을 아끼겠다"고 했다. 정 위원장은 성균관대 교수(법학과) 출신이다. 하지만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정 위원장은 자신의 경제관, 철학관, 공정위의 주요 정책방향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

 

우선 정 위원장은 "우리나라 경제가 자유시장경제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우파적인 것과 좌파적인 것 중 구체적으로 어느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이 결여됐다"고 지적했다.

 

각국의 경제질서는 국가 공권력의 경제개입 정도에 따라 순수한 자유시장경제와 완전한 계획경제 사이에 자리 잡게 되는데, 미국 경제가 우파적인 자유시장경제에 가깝다면 독일, 프랑스, 북구의 서구사회주의 국가는 계획경제에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헌법학계에서는 헌법의 경제조항을 근거로 우리나라의 경제를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로 보기도 하고, 심지어 독일보다 더 통제경제에 가까운 체제라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저는 생각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 경제질서는 북유럽은 물론 독일이나 일본보다 훨씬 더 시장기능이 강조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보다 더 경쟁지향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봉건분권화의 경험이 없고 중앙집중적인 정치시스템으로 일관했다. 속담에도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라고 하듯이 집중화 내지 쏠림현상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나타났다."

 

그는 "경제당국의 수장으로서 우리나라 국민성에 걸맞고 시장의 구조와 기업들의 행태에 부합하는 한국형 시장경제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그려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법학을 공부하고 가르친 교수가 속담까지 언급하며 '국민성'을 근거로 한국형 시장경제모형을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헌법상의 경제 원칙에는 반대했던 정 위원장이 이번에는 '경제헌법'을 언급하고 나섰다. "시장경제와 경쟁질서는 경제헌법인 공정거래법과 경쟁정책의 집행을 통해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그의 경제관은 대기업 규제 정책에 대한 입장에서 구체화됐다. 그는 "지난 3월 대표적인 사전기업규제 제도로서 여겨지던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를 폐지하고 기업집단현황 공시제도 등을 도입하여 시장을 통한 자율감시체제로 전환한 것은 큰 성과"라며 "앞으로 정책방향 및 집행의 일관성을 통해 시장의 예측가능성과 대정부 신뢰성을 제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또 "핵심적 규율을 제외하고는 시장 감시로 대체가 가능한 규제는 폐지 또는 완화함으로써 지주회사로의 전환비용을 낮추는 방향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총제 폐지나 지주회사 규제완화 방안은 대기업집단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것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인 친기업·재벌 정책이다.

 

이에 대해 공정위의 한 간부는 "지난 금융위기의 원인이 우파적인 자유시장경제 때문이라는 분석 때문에 현재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이전 정부와 달리 국가가 개입해 철저한 경쟁정책을 강화하고 있다"며 "우리도 변화하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친삼성·친재벌 입장 견지해온 인사가 시장경제 파수꾼?"

 

사실 정호열 위원장이 그동안 보여온 행보 등으로 인해, 그의 내정 당시부터 '과연 진정한 시장경제의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논란이 제기돼 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 위원장이 생명보험사의 주식시장 상장과 삼성전자에 대한 주주대표 소송 등에서 삼성의 입장을 대변해왔다는 점이다.

 

정 내정자는 2007년 생명보험사의 상장을 둘러싼 논란이 제기됐을 당시 보험계약자가 아닌 보험업계의 이익에 부합하는 입장을 폈다. 시민단체 등은 '보험계약자가 생명보험사의 성장에 기여한 만큼 생보사는 상호회사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어 생보사의 상장 차익을 보험계약자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 위원장은 "상호회사적 성격을 인정하면 규범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며 생보업계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또 지난 2002년 1월 언론기고문을 통해 삼성전자 주주대표소송 1심에서 재판부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기업 지배구조를 잘못 이해했으며 균형을 잃은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정 내정자는 이 기고문에서 "기업은 도덕성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효율성을 지향하는 영리집단일 따름"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정 위원장 취임 당시 낸 논평에서 "그동안 친삼성·친재벌 입장을 견지해온 인사가 재벌정책을 총괄하는 공정거래위원장 자리에 오르게 돼 재벌의 경제력 집중 억제와 지배구조 개선이 얼마나 후퇴할지 걱정"이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신문고시 반대론자가 '폐지'하지 못한 까닭은?

 

정호열 위원장은 또한 신문고시 반대론자다. 이미 지난 2001년 신문고시 제정 당시 언론 칼럼을 통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취임 직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그동안의 (신문고시) 집행 현황을 점검해 필요 없다면 제거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난달 12일 열린 공정위 전원회의에서 신문고시가 폐지될 것으로 예상됐다.

 

현 정부 들어 존폐 논란이 일기 시작한 신문고시는 언론재벌에 대한 대표적인 규제다. 만약 공정위가 신문고시를 폐지했다면, 구독자수를 늘리기 위해 상품권·현금 등 불법 경품을 지급하거나 무가지를 뿌리며 불공정 행위를 저지른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을 용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돼, 거센 비판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정 위원장 주재로 열린 전원회의는 '3년 후 재검토' 결정을 내렸다. 정호영 위원장은 왜 신문고시를 폐지하지 못했을까? 이날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정 위원장은 그 배경을 설명했다.

 

정 위원장은 "지금도 내용이나 이념적으로 (신문고시를) 찬성하지 않지만, 신문고시가 도입돼 운영되면서 신문사들이 각자 대응력을 가지고 있고, 재정이 열악한 지방신문과 야당이 반대하는 등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정파적인 논란으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 3년간 폐지를 유예시켰다"고 설명했다.

 

'여론' 때문에 신문고시 폐지를 '유예'한 것일 뿐,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신문 판매시장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단속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올 들어 185건의 신문고시 위반사항이 접수됐지만 과징금을 부과한 것은 단 1건(210만원)에 불과하다. 또한 공정위는 2007년 이후 3년째 직권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 결국 신문고시는 이미 '사문화'됐다고 보고, 괜히 '벌집'을 건드려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한 셈이다.

 

"읽어도 도움 안 되는 무가지보다는..."

 

한편 정호열 위원장은 신문고시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무가지의 폐해'를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대부분 시민들은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등 신문을 보지 않고, 무가지(무료신문)를 보고 있다. 무가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한 기자가 쓴 퀠리티 페이퍼(정론지)가 아니다. '최진실 유골함 분실' 같은 기사는 읽어도 도움이 안 된다. 시민들의 시민의식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유가지(유료신문)를 읽어야 한다.

 

(신문고시에 따르면 유료신문은) 무료로 뿌릴 수 있는 한도가 (구독료의) 20%인데, 지하철 입구에 한겨레, 조선, 동아, 중앙 등 퀠리티 페이퍼를 뿌려서라도, 시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신문고시는 문제가 있다. 유가지를 구독료의 20%밖에 (무료로) 뿌릴 수 없다는 것은 (무가지가 100% 무료로 공급되는 것에 비해) 형평성에서 문제가 크다."

 

이에 대해 무가지를 발행하고 있는 한 언론사의 소속 기자는 "무가지에 실리는 대부분의 기사는 연합뉴스"라며 "정 위원장의 얘기대로라면 연합뉴스는 읽어도 도움이 안 되는 기사라는 말"이냐고 씁쓸하게 웃었다.

#정호영 공정거래위원장 #한국시장경제모형 #신문고시 #무가지 #친기업.친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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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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