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개구리작년까지도 보이던 금개구리는 이제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아쉽다. 많았을 때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김수복
한 생명이 사라지면서 다른 한 생명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순환에 얽힌 내력을 잘 몰랐던 시절에 나는 개구리를 먹는 뱀만 보면 돌로 쳐서 죽이곤 했었다. 그 시절의 내가 옳았던 것일까? 아니면 죽어가는 소리에서 미학적인 쾌감을 느끼는 지금의 내가 옳은 것인가. 이런 질문은 일단 빠져들기 시작하면 헤어나기 어려운 덫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슬쩍 피해서 다시 생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내가 마당에 웅덩이를 파던 그 무렵에는 금개구리가 곧잘 눈에 띄고는 했었다.
배때기가 그야말로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이 노오란, 등은 푸르면서도 금빛이 나고, 눈 가장자리에 다시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가만히 다가가서 손으로 잡아도 자기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졌는지 관심조차 없다는 듯 눈알이나 뱅뱅 돌리던, 그런 금개구리를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자주 목격되던 그 시절에 뱀은 거의 만나보기 어려웠다.
2산이면 산마다 촘촘한 그물을 둘러쳐서 동면에 들어가는 뱀을 그 새끼까지 잡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가 어디에 어떤 그물을 설치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해 미처 쓸어가지 못한 뱀들이 이듬해 봄이면 죽은 채로 무더기무더기 발견되기도 했다. 인간의 그런 욕망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몹쓸 야만이라는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저인망식으로 쓸어가는 뱀 사냥을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법이 시행되면서 산에 설치된 그물은 모두 회수되거나 찢겨진 채로 방치되었다가 흙 속으로 들어갔다.
뱀은 이제 안정적으로 후손을 생산하고 양육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개구리들에게는 암흑의 시절이 도래한 셈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드물게나마 눈에 띄던 금개구리가 금년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면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두꺼비도 사라져 버렸고, 보이는 게 참개구리와 황소개구리 뿐이다. 참개구리는 금개구리에 비해 몸집이 더 크고, 조금 더 민첩한 까닭에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황소개구리는 뱀을 아예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황소개구리는 두려워하지 않는 뱀을 인간은 두려워한다. 작년 가을에 우리 앞집 아주머니는 문을 열어놓고 텃밭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기절을 해 버렸다. 싱크대 밑에서 커다란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며칠 전 저녁에 마당을 나섰다가 토방으로 막 기어오르는 뱀을 밟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는데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후둑후둑 뛴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사람이 줄어든 시골 마을에 뱀들이 주역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공존, 공생,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기는 하지만, 개구리나 도마뱀 혹은 들꽃이나 풍뎅이들과는 달라서 뱀이라는 녀석은 그 살아가는 방식부터가 그리 썩 유쾌하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뱀이 인간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는다 해도,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어딘가에, 이를테면 이불 속이나 천장 위에 녀석이 지금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문득문득 긴장하는 것은 근거 없는 피해의식만은 아니다. 부쩍 증가한 뱀의 개체수를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부딪치기까지 하는 데서 오는 공포감이다.
과일나무를 공격하는 까치와 인간의 관계설정에 관한 논의가 이미 있었듯이, 뱀도 이제 그 개체수 조정에 관한 논의를 해볼 때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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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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