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악마, 공권력의 심장에 칼 들이대다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 (25회) 사랑과 정의

등록 2009.09.21 10:13수정 2009.10.1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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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정의

피살자가 현직 검사이고, 'EVIL' 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는 것은 기자들을 흥분시켰다. 가장 먼저 질문에 나선 것은 역시 <조센일보>의 선준혁이었다. 그는 살인사건만 발생하면 무엇이든지 연쇄살인이기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연쇄살인에 유달리 집착을 보였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과 연계된 사건이라고 보십니까?"

김인철은 조수경 대신에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희생자가 검사 분이고 'EVIL' 이라는 영어 대문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연계성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김인철은 연계성이 있는데 일부러 말을 아낀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다.

"동일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더 수사해 봐야 압니다."
"아직까지 나타난 바로는 유사하다는 말씀입니까?"
"현직 검사가 피살 대상이었고 영어 대문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범인은 사회 지도층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씀이군요?"
"검사가 사회 지도층인지, 그리고 사회에 '지도층'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인철은 기자들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김인철에게서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한 기자들은 조수경에게로 몰려와 물었다.

"저는 김인철 수사관과 같은 관점입니다."


조수경은 같은 답변만을 되풀이했다.

신문들은 일단 인터넷판을 통해 새로운 살인사건을 일제히 자극적으로 보도했다.

-악마, 공권력의 심장에 칼을 들이대다
-악마의 손길은 어디까지, 이제는 사법기관마저
-범행 중단 예고는 계산된 기만전술이었다

언론들은 새로운 사건이 이전 사건들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가정 하에 기사를 내보냈다. 한두 개 신문 정도만 모방범죄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언론들의 무리한 추정 보도가 나갈 만큼 나갔음을 확인한 조수경과 김인철은 기자실에 들러 짤막하게 말했다.

"이번 검사 피살 사건은 이전 사건들과는 별개입니다."

김인철의 말에 기자들은 일제히 웅성거렸다.

"아니 어제는?"
"어제는 피살자가 검사고 영어 대문자가 쓰여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기자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새로운 질문 공세를 펼쳤다.

"그럼 범인은 누구라고 보십니까?"
"영어 대문자를 써 놓은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번에는 조수경이 나서서 말했다.

"국과수 분석이 나와야 압니다."
"어제는 증거물 말씀을 안 하셨잖습니까?"
"물으시면 대답하려고 했었습니다."

조수경과 김인철은 기자실에서 나왔다. 김인철은 득의의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이틀 후 국과수에서 증거물 성분 분석 결과를 보냈다. 족적은 10여 종류나 되어서 수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수백 개 나온 모발은 대부분이 개의 털이고 일부만 사람의 것이었다. 다행히 현장 채취가 신속하게 이루어져 모발의 뿌리세포가 살아 있었다. 그래서 모발을 이용한 DNA 유전자 분석이 이루어졌다.

유전자의 본체는 이옥시라이보 핵산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유전적 성질을 지배한다. DNA 지문이란 유전자 본체의 단편인 미니새터라이트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위는 수십 또는 수백 염기쌍이 수만 회 이상 같은 방향으로 반복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구조의 패턴이 사람마다 확연히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만 동일하다는 설이 유력하나 그들의 것에도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별개 두 사람의 DNA가 같을 확률은 7,000분의 1에서 3억분의 1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르다는 전제에서 유전자 지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지문에는 두 가지 절대적 성격이 있다. 하나는 만인부동(萬人不同)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존생불변(存生不變)의 법칙이다. 첫째, 동일한 지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한 번 세상에 가지고 태어난 지문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모발 중 하나는 피살자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가 범인의 것이었다. 그런데 범인의 모발에서는 알코올 성분이 다량(13.8ppm) 검출되었다. 이것은 범인이 알코올을 취급하는 직업에 장기간 종사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증거였다.

사건은 금품을 얻기 위한 강도 살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금품을 노렸다면 산책 중인 대상을 공격할 리가 없었다. 피살자가 검사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직책상 생긴 원한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피해자 주변의 가족이나 인간관계에도 초점을 맞춰 수사할 필요가 있었다.

조수경은 사건이 인근 불량배의 우발적 범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지만 지나치게 범위를 축소한 단정으로부터 출발하는 수사는 그것이 장애를 만나 벽에 부닥칠 경우, 수습하거나 만회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조수경은 사건의 프로파일링에 앞서 김인철과 상의했다.

"김 경위, 인근 불량배의 우발적 범죄일 가능성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

김인철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수경의 말을 섣불리 부정하지는 않았다.

"모든 살인에는 계획적인 것과 우발적인 것이 있으니까요."
"나도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보지는 않는데, 그래도 만약 직책상 생긴 원한이 아니거나 주변 인간관계에서 빚어진 살인이 아닐 경우, 해결의 통로가 막힐 것을 생각하는 거야."

"아무튼 이 사건은 용의자를 가리기에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꼭 그렇게 볼 수만도 없어. 왜냐면 살인에는 계획과 우발이 복합되는 수도 있는 거니까."

조수경은 '현직 검사 양재천 피살사건'의 프로파일링에 착수했다.

1. 피살자의 직업상 특수성으로 보아 원한 살인일 가능성이 높다. 피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받아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려야 한다.
2. 그러나 주변 인간관계에 대한 수사도 병행해야 한다.(원한 사건은 주변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
3. 범인은 주류 관련 직업에 장기간 종사했다.(모발에서 알코올 성분 다량 검출)
4. 범인이 남긴 'EVIL'은 최근 일련의 사건과는 무관하다.(대상의 지칭 방식과 필체가 현저히 다르다.)

5. 범인은 현장 부근에 살거나 아니면 사건 발생 일정 시간 후 주변에서 택시를 이용해 귀가했을 가능성이 높다.(차를 가지고 가서 범행할 정황이 아니었다.)
6. 젊은 검사일 경우 결혼 과정에서 원한이 빚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요즘 추세이니 이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7. 직책 또는 주변 인간관계와 거의 관련이 없는 자의 범행일 수도 있다.
#유전자지문 #지문의두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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