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빈길 장군은 낙안군 옥산부근에서 1369년에 태어났다. 지금으로부터 640년 전의 일로 이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낙안군 지역이 피폐하고 혼란스러울 때다. 혼란스런 시기에 태어났다는 것은 큰 불행일수도 있지만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가 왜구와 전쟁을 벌였던 기록을 보면 1394년 낙안군 지역에서 전라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받아 경상도 사천앞바다까지 출전해 왜적을 무찔러 왕이 크게 탄복하고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태조 3년(1394) 왜선 3척을 섬멸, 왜선 1척을 섬멸, 왜선 3척을 섬멸한 전라 수군첨절제사 김빈길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이후, 1397년 왜구와 맞서기 위해 현재의 낙안읍성을 흙으로 쌓았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약 30여년 후인 1426년에 그 토성을 근거로 다시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대략 현재 낙안읍성의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는 석성으로 증축한 부분이 자세히 나와 있다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조선시대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글을 써서 아뢰는 문서)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다.'
이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관직을 버리고 낙안군 백이산 부근에 망해당이라는 정사를 짓고 노후를 보내면서 낙안군 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낙안팔경:망해당기>인 <금강모종><백이청풍><보람명월><옥산취죽영><징산숙로><평지부사><단교어화><원포귀범>은 이 지역에 지금까지 내려오는 가장 유명한 한시가 됐다.
늘그막에 김빈길 장군은 전북 고창으로 친인척과 함께 모두 이주하게 되는데 고향인 낙안과는 약 100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생소한 곳이며 낙안군 지역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장수가 일가친척을 모두 데리고 고향을 떠나게 된 점은 뭔가 말 못할 고민이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해 김빈길 장군 후손들은 "당시 남해안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잦고 국가적으로도 혼란스러운 가운데 모함이 난무해 야인으로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고 증언해 주고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고 백의종군하던 것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전북 고창에서의 야인 생활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그곳에서도 왜적의 침입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다시 전쟁터로 나갔는데 결국 사진포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왕은 김빈길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증의정부(贈議政府)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하고 양혜(養惠)라는 시호까지 내렸다고한다.
현재, 전북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의 김빈길 장군 묘소에는 신도비 등이 세워져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고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에는 김빈길 장군 영정을 모신 화천사라는 사당이 있어 매년 2월 보름 향사를 지내고 있다.
그에 반해, 고향땅인 낙안에는 옥산 부근의 생가나 백이산 자락의 정자인 망해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고작 낙안향교내 충민사의 영정 한 장이 전부다. 특히, 그가 쌓았던 낙안읍성내에도 김빈길 장군과 관련해 흔한 비석조차 없다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김빈길 장군이 낙안군의 중시조나 마찬가지며 낙안읍성을 최초로 쌓은 인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런 모습은 부끄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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