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 - 제19회

하늘로 날아간 나의 돛단배

등록 2009.09.29 10:14수정 2009.10.1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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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이네 할아버지의 소상(小祥)이었다. 송남이의 할아버지가 일 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일주기를 맞는 첫 제삿날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어른들이 마당에 모여서 음식을 나르고, 술을 마시고, 마당 한쪽에 덕석을 펴놓고 윷놀이를 하며 왁자하게 떠들고…하는 모습을 보면 제삿날이라기보다는 꼭 무슨 잔칫날 같았다.

우리 같은 아이들이 섞일 만한 자리가 없었으므로 송남이와 종석이와 나는 그 소란스러운 앞마당을 피해 집 뒤란으로 돌아가서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송남이 차례가 되었는데 녀석은 재미가 시들해졌는지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감나무 가지 너머로 던져버렸다. 그러더니 부엌 쪽으로 가서 오징어 뼈(갑오징어의 뱃속에서 꺼낸 석회질로 된 길쭉한 물건) 세 개를 들고 나타났다.


"우리 요걸로 돛단배 맨들어서 쩌그 둠벙으로 배 띄우러 가자."

오징어 뼈는 그 자체가 배 모양을 하고 있어서 거기다 대나무 가지를 깎아서 두 개나 세 개쯤 돛대를 세우고, 창호지를 잘라서 각각 돛을 달기만 하면 금세 돛단배가 완성되었다. 그걸 가지고 웅덩이로 가서 바람의 방향을 잘 잡아 물에 띄우면 오징어 뼈 돛단배는 물살을 헤치고 정말로 '살같이' 내달렸다. 그런 놀이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야, 우리가 일이학년 아그들도 아닌디 맨날 둠벙에 가서 장난감 돛단배 시합이나 하자고? 선창에 가서 진짜 배를 몰고 돛달고 멀리 수펭선으로 가자고 하면 모르까."

나는 송남이가 준 오징어 뼈를 송남이가 구슬을 던졌던 방향으로 내던져버렸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아직도 겨우 국민학생이라는 사실이 영 못마땅했다. 나도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 바다로 나갈 만한 우리의 돛단배가 아직 우리에겐 없었다.

그 때 송남이가 종석이와 내 얼굴을 빠르게 번갈아 살피더니 은근하게 이런 제안을 하고 나섰다.
"그라먼, 우리도 술을 조깐 마세 볼래? 소주!"
종석이와 나는 녀석의 돌발적인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야, 아부지 심바람할 때 막걸리는 마세봤는디 소주는…"
"난 소주 입에 대봤그등. 그란디 그거 징하게 독하드라."
우리 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송남이는 기어코 소주를 마시고야 말겠다는 태세였다.

"어른들은 암시랑토 안 하다가도 소주 마시고 취하면 뜬금없이 노래도 불르고 춤도 추고 안 그라냐. 소주가 독하기는 해도 꾹 참고 마시면 기분이 징하게 좋아진대."
"그래? 그라먼 우리도 한 번 마세보자."
소주를 마시는 일은 구슬치기보다, 오징어 뼈로 만든 배에 돛을 세우고 웅덩이에 띄우는 놀이보다 확실히 더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그란디 소주가 있어야 마시제. 송남이 너가 또 몰래 갖고 올라고?"
송남이는 대답 대신 뒤란의 텃밭에 쌓인 빈 병들을 가리켰다. 소상을 치르면서 동네 사람들이 마시고난 한 되 들이 빈 소주병들이 뒤란 텃밭에 상자 째로 쌓여 있었다.


"저것들은 다 빈 벵들인디?"
"그래도 벵 바닥에 조깐씩은 남어 있당께."
송남이는 빈 됫병 바닥에 조금씩 고여 있는 소주들을 한 데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도 거들었다. 열 몇 개의 빈 병을 가져다가 거꾸로 기울여 한 곳에 모으자 됫병 바닥에 손가락 깊이만큼 소주가 차올랐다. 
"여그는 사람들이 너머 많응께, 선호 느그 집으로 가서 마시자."
"좋아. 우리 집에 시방 암도 없그등."

송남이가 집안으로 들어가 보자기를 가져오더니 소주병을 감싸 안았다. 우리는 동네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송남이네 집을 빠져나와 우리 집으로 왔다. 역시 뒤란 구석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이도록 볏짚마름 틈바구니에 웅크려 앉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 마실 것인지를 놓고 티격태격하였다. 그럴 때면 쉬운 방법이 있었다.
"가위 바위 보!"
다행히 내가 꼴찌였다. 먼저 종석이가 소주병을 들어 조심스레 기울이더니 한 모금을 마시고는 캑캑거렸다. 송남이 차례였다. 녀석은 종석이보다 조금 더 마셨는데도 마치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마시고나서 '캬아' 소리를 냈다. 이제 내가 소주병을 받아 들었다.


"느그 둘이 마셌는디 어째서 소주가 한나도 안 줄고 그대로냐?"
바닥이 넓은 됫병이어서 그런지 깊이에 비해서 양이 만만치 않게 많아 보였다.
"일단 선호 너도 한 모금을 얼릉 마시랑께!"
송남이와 종석이가 재촉을 하였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소주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병 주둥이를 물고 어지간히 기울였는데도 아직 술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종석이가,
"앗다, 요렇게 해야 술이 나오제."
하면서 병 밑바닥을 추켜올렸다. 그 바람이 바닥에 고여 있던 술이 내 입으로 왈칵 쏟아져 들어왔고 얼결에 파도에 실려 오는 바닷물을 들이켜듯이 입안으로 들어온 술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우엑! 케엑, 케엑…"
갑자가 목구멍이 활활 타올랐다. 순식간에 초가집의 처마 끝이 뱅글뱅글 돌았다. 어지러워서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두 녀석들도 취기가 얼큰히 돈 듯 늘어진 몸을 볏짚 마름에 기대고서 숨을 거칠게 내쉬거나 혹은 딸꾹질을 했다.
음주를 하고나면 가무를 하는 것이 어른들이 노는 방법이었다. 드디어 송남이가 적당히 기분이 좋아졌는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번만 만났으면 좋겠네
뒤돌아가는 님을 또 보고
내일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어떻게 기다려…

나는 술기운이 퍼져 정신이 없는 중에도 송남이가 '어떻게 기다려…' 그 다음 가사를 뭐라고 할 것인지 궁금했다.
"너 뽀사 남보나."
송남이가 그랬다. 그러자 듣고 있던 종석이는 '너 뽀사 남보나'가 아니고 '너 뽀송 놈보나'라고 했다. 나는 그 둘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두 녀석은 제법 꼬부라진 목소리로 서로 자기가 한 발음이 옳다고 우겼다.

우리 동네의 갯바위에 남포(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서 한 달 여 동안이나 자갈을 육지로 실어 나르던 바지선이 있었는데 그 배에는 확성기 장치가 돼 있었다. 그런데 레코드가 단 한 장밖에 없었던지 동네 앞바다를 드나들 때마다 온종일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틀었다. 그래서 우리는 멋도 모르고 엇비슷하게 흉내를 내어서 흥얼거리고 돌아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래의 제목은 '너 뽀사 남보나'도 아니고 '너 뽀송 놈보나'도 아니었다. 60년대에 '더 써처스(The Searchers)'에 의해서 불리어진 '러브 포션 넘버 나인( Love Potion No.9)'이라는 노래였다.

본래는 이태신이나 쟈니리가 '사랑의 향수 제9번' 혹은 '사랑 묘약 제9번'이라는 따위의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지만 '송진 냄새 나는 그 묘약을 꿀꺽 마시고 취해서 길 가던 경찰을 붙들고 키스를 했다…' 어쩌고 하는 따위의 가사가 당시의 우리나라 정서상 건전치 못 하다 생각했던 것일까? 누군가가 그 곡에다 '한번만 만났으면 좋겠네…' 운운의 전혀 엉뚱한 가사를 꿰맞춰 부르면서 마지막에 '러브 포션 넘버 나인'만 붙여 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 말이 제법 고상하게 들려서 멋대로 흉내 내어서 중얼거리고 다녔다. 그 때 우리는 외래어 비슷한 것만 보거나 들으면 왜 그리 기를 쓰고 흉내 내고 싶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음 날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면서 변소 간에 앉아서 나는 이렇게 다짐을 했다. 
"나 앞으로 펭생 동안 절대로 소주 안 마셔!"
그런데 지금, 술자리에서 나는 주로 소주만 마신다.

국민학교 생활을 통틀어서 나는 담임선생님 복이 없는 편이었다. 또한 유난히 선생님과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새로 맞이하게 된 4학년 담임선생님은 도통 학생들에게 공부 가르치는 수고를 하려 들지 않았다. 나와 희철이와 재술이 세 아이가 선생님의 판서담당 조교인 셈이었다. 시작종이 울리면 선생님은 두툼한 '동아전과'를 들고 들어와서는 우리 셋 중 한 아이를 나오라 했다.
"야, 이선호, 나와서 여그 접어논 것 판서해라."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키가 작았으므로 칠판을 4등분쯤으로 나눈 다음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판서를 하다가 다시 내려와서 의자를 옆으로 옮긴 다음 또 올라서고를 너덧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그런데 분명히 줄을 잘 맞춰 반듯하게 적는다고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자에서 내려와 바라보면 분필 글씨가 영 삐뚤빼뚤 엉망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필기를 마칠 무렵쯤 되면 그때에야 교사용 책상에서 일어나 교단으로 올라서서는,
"필기들 다 했냐? 뭔 소린지 알겄제? 집에 가서 한 번씩 더 읽어봐라 이."
그러고는 수업 끝이었다.

4학년 1학기말 시험을 치렀는데, 나는 선생님이 거의 전 과목의 시험문제를 '동아전과'의 연습문제와 '동아수련장'이라는 문제집에서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반반씩 베껴 출제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확인하고서 맥이 빠졌다. 물론 우리 집은 가난하였으므로 나는 전과나 수련장 따위를 갖추고 있지 못 했다. 한편 다행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내게 전과와 수련장이 있었으면 거기 나온 문제만 달달 외웠을 텐데 그런 것이 없었으니 그나마 공부를 좀 더 하게 된 것 아니었을까.

"자, 오늘은 어지께 얘기했던 대로 미술 실기시험을 칠 것잉께, 도화지하고 크레용하고 챙겨들고 방기뜸 너리박으로 전부 가자."

날씨가 궂은 날을 제외하고는 미술시간이면 무조건 방기뜸 바닷가로 나갔다. 그곳 갯바탕 위쪽에는 자갈 더미가 울룩불룩 솟아 있었다. 예전에 어린아이가 죽으면 자갈을 파고 묻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아마도 아이의 시신을 방기(放棄)했던 곳이어서 '방기뜸'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사오십 명의 학생들이 너끈히 자리를 잡고도 남을 만큼 넓고 평평한 널바위가 있었다. 그 널바위는 학년을 불문하고 우리 봉선국민학교 학생들이 미술 시간마다 자리를 잡는, 우리학교의 전용 '미술교실'이었다.
"자, 오늘 그려낸 그림 점수로 학기말 시험 대신할 것잉께 잘 그려야 돼."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지시하고는 바위 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 돛단배 한 척이 청산도 쪽을 향하여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봤자 거기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는 언제나 그 바다였고, 섬들도 어디로 떠내려가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지난주에도 그렸고 지지난 주에도 그렸고 1학년 때도 그렸고 2학년 때도 그렸던 똑같은 바다 그림을 또 그릴 생각을 하니 영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교실마다 뒤편의 '솜씨자랑' 게시판에 붙어 있는 그림들은 학년을 불문하고 거의가 판박이였다. 똑같이 생긴 섬들에다 돛단배에다 갈매기에다…. 

뭔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어 바다 쪽을 바라봤지만 내 도화지로 초대해 담기에는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생김새가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 바로 이거야!'

바다 쪽으로 엉덩이를 향한 채, 허리를 굽혀 고개를 가랑이 사이에 디밀고서 바다를 바라봤는데 여태 못 보던 풍경이 거기 있지 않겠는가!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늘과 바다가 서로 자리를 뒤바꾼 모양이 된 것이다. 파란 바닷물이 맨 위에 떠 있고, 돛단배는 돛을 고드름처럼 거꾸로 매단 채 흘러가고 있었으며, 삼각형 모양으로 펑퍼짐하게 앉아있던 섬도 꼭짓점을 아래로 향한 채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좋아. 요놈을 그리는 것이여!'

나는 엉덩이를 바다 쪽으로 치켜든 아주 묘한 자세를 하고서 우선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깔깔댔지만 명작을 만들어 내자면 그 정도의 부끄러움은 참아야 한다고 다짐을 했다.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가끔 허리를 펴고 고개운동을 해가면서 열심히 그렸다.

드디어 연필로 1차 스케치를 완성했다 싶었는데 결과는 낭패였다.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바라본 풍경을 낑낑거리며 어렵사리 그렸던 것인데, 도화지를 반대로 돌려놓고 보니 다른 아이들의 그림과 똑같아져버린 것이다. 하늘은 다시 위로 올라가 있고 바다는 제 자리로 내려와 버렸으며 물구나무 서 있던 돛단배도, 섬들도 다 바른 자세가 돼버린 것이었다.

고민 끝에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엉덩이를 바다로 향하고 고개를 거꾸로 했을 때 내 시야의 양쪽 가장자리에 보이는 내 두 가랑이를 그림에다 넣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바다가 맨 위에 있고, 섬이나 돛단배가 해수면의 아래쪽으로 매달려 있고, 그 밑에 하늘이 있고, 맨 아래에서 내 두 가랑이가 하늘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될 것이었다.

"자, 다 그렸으면 한 사람씩 가져와 봐라 이. 점수를 매길 테니께."
1, 2학년 때 같으면 2교시 만에 겨우 한 장을 완성할까 말까 했는데, 바다 그림을 워낙 여러 번 그리다보니 아이들도 재주가 늘어서 1교시가 끝나기도 전에 대부분 색칠까지 완성해서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으음, 김명준이! 잘 그리긴 했는데 바다색깔이 어째 요렇게 생겼냐?"
"파란 크레용이 다 떨어져부러서 할 수 없이 회색으로 칠했는디요."
"그래? 잘 그렸다. 92점!"
"야, 순임이 너는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가 어떻게 이렇게 지느러미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냐. 순 엉터리로구먼. 82점!"

점수를 잘 받은 아이는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고, 기대했던 점수를 못 받은 아이는 우거지상이 됐지만, 그래도 70점미만의 점수를 받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본시 미술이나 음악 등의 실기시험 점수는 넉넉하게 주는 것이 관례였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그림 아래쪽에다 검은 크레파스로 '4학년 1반 이선호'라고 또렷하게 적은 다음 선생님에게 그림을 내밀었다. 그런데, 우선 그림을 감상하는 선생님의 자세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요 녀석은…야, 인마, 이름을 똑바로 써야지, 거꾸로 써서 내는 녀석이 어딨어."
선생님은 내 그림을 반대편으로 돌리면서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란디, 하늘에 양쪽으로 요렇게 뻗대놓은 건 또 뭣이여? 무지개를 요렇게 칙칙하게 그려놓은 모냥이네, 짜아식."
"아닙니다, 선생님. 시방 선생님은 지 그림을 거꾸로 들고 계십니다. 요렇게 해야 똑바로 보는 것인디……"
나는 그림의 위아래를 바꿔서 선생님에게 도화지를 똑바로 쥐어 주었다.
"이눔 자석이 시방 뭣 하자는 것이여? 야, 이눔아, 그라면 요것이 바다고 요것이 하늘이란 말이여?"
"예, 선생님. 지가 바다를 똑바로 서서 보고 그린 거이 아니고요, 물구나무를 서서 바다를 거꾸로 본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너 말대로 요렇게 보는 것이 그림을 똑바로 보는 것이라면, 하늘 위에 떠 있는 바닷물이 어딨어, 이놈아! 그라면 이건 돛단배가 아니고 비행기가 돛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날아가는 것이여?"

선생님은 낯빛을 벌겋게 붉히기까지 하면서 소리소리 내질렀다. 처음엔 낄낄대면서 웃던 아이들도 내가 워낙 무섭게 닦달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야, 이선호! 너 고개 들고 쩌그 쳐다봐. 저거이 하늘이냐 바다냐?"
나는 선생님의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그러자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너, 그라면 여그 요건 또 뭣이냐?"
"그건…지 양쪽 가랭이…가랭이를 벌리고 거꾸로 봤응께…"
긴장하고 있던 아이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이름을 거꾸로 잘못 썼다고 했으면 기본 점수래도 줄라고 했는데…넌 우리 반에서 최하점이야 인마. 40점!"

선생님은 검은 크레파스로 커다랗게 40이라고 쓰고서 그 아래에다 수평선 길이만큼 길게 두 줄을 좍좍 그었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이렇게 말했다.
"선호 너, 요 녀석, 거꾸로 보는 것을 영판 좋아하는 모냥인데, 내가 실컷 보게 맨들어 주지. 끝 종 칠 때까지 저 바위 위에 두 발 걸치고 물구나무 서 있어!"

나는 하는 수 없이 갯바위 언덕에 두 발을 올리고 물구나무를 선 채로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속다짐을 했지만,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고 기본점수 70점이라도 받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도리질을 했다. 이상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바다 그림을 무수히 그리면서는 눈에 보이는 섬들과 바다를 오가는 돛단배와 하늘을 나는 갈매기들이나…그것들 모두가 늘 그 자리에 있는, 지루하고도 따분한 소품들처럼 여겨졌었는데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니 느낌이 달랐다. 하늘 자리로 올라간 바다, 바다 자리로 내려온 하늘이 나만의 것인 양 정겹게 느껴졌다. 하얀 파도를 머리띠처럼 이마에 두르고 있는 섬들의 모양도 참으로 재미졌다. 다만 물구나무를 너무 오래 선 탓인지 두 팔이 후들거리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게다가 눈물이 났다.

'어째서 요렇게 눈물이 나는지 몰르겄네.'
나는 아이들에게 결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울어버린다면 녀석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은 80점이나 90점을 맞았는데 나만 40점을 받아서 우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받은 점수 따위가 부럽지도, 내가 받은 40점이 부끄럽거나 서럽지도 않았다. 아니, 참, 아이들이야 어찌 생각을 하든 무시하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나 스스로에게는 무어라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때 좋은 생각이 났다.

'맞어. 아까침에 그림 그릴 때 오줌이 마려웠그등. 그란디 고놈을 참고 있다가 갑자기 물구나무를 서분께, 오줌이 거꾸로 내레와서 눈으로 나와분 것이여. 그랑께 요건 눈물이 아니라 오줌이여 오줌.'
다소 억지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야, 종 쳤어 인마! 그만 일어서!"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일어설 수 없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한눈 판 사이에, 물구나무서서 바로보고 있던 풍경 중에서 조금 전에 보이던 돛단배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어어? 어디 갔지…아, 저기!'
그렇지, 거기 있었다. 나의 돛단배는 예쁜 돛을 고드름처럼 아래로 향한 채 둥실 떠올라서는 근사하고도 멋지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제1부 끝

연재를 잠정 중단합니다
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에 성원을 보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연재분인 제19회 연재 원고 말미에 덧붙이는 글에서 "곧 이어서 제2부 '바다에 누워 꿈을 꾸다'를 연재하겠다"고 공지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연재되었던 제1부의 내용을 손질하고 제2부의 내용을 구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연재를 잠정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이 고민하고 성찰해서 이른 시일 안에 알찬 내용으로 독자 여러분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상락

덧붙이는 글 | 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 제1부의 연재를 마칩니다. 연재했던 이야기는 곧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 제1부의 연재를 마칩니다. 연재했던 이야기는 곧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술심부름 #섬마을 학교 미술시간 #반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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