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천리 석장승전북 부안 월천리 한 민가 안에 서 있는 한쌍의 돌장승이다. 이 장승은 각각 환웅과 단군 두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단군과 환웅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특이한 장승이다.
문화재청
우선 가장 오래된 <일본서기>에는 562년에 일본 군대가 당시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하여 진귀한 보물을 갖고 돌아왔다고만 기술하고 있다(①). 물론 이 내용 자체의 진위도 우리로서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데, 19세기 <국사략>이라는 일본의 역사책에는 이때 오나라 사람 지총이 각종 서적과 불상, 악기 같은 것을 들고 일본에 들어왔다고 하였다(②). 김두종처럼 일본 의학사를 정립한 후지가와 유우는 지총이 갖고 온 책들 속에 의약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중국의학이 전래되기 시작한 계기라고 기술하였다(③).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의 역사기술이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살았던 이들에게 위와 같은 역사서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능화의 기술로써 고구려 초기에는 의술을 알지 못하여 중국을 통해 의술을 습득하였다고 한 점이다(④). 건국으로부터 쇠망에 이르렀던, 적어도 7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전쟁을 치렀고 강력한 국가를 만든 것이 고구려 사람들이다. 전쟁으로 많은 백성들이 다쳤을 터인데도 의술을 알지 못해 늘상 힘겨루기를 하던 옆 나라로부터 배우고서야 알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어서 이웃 나라로부터 모든 것을 이식받았다는 식민주의 역사관이며, 고구려에는 남아있는 사료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의학적 지식이 없었다고 간주하는 실증주의 역사관이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사의 모든 문화현상은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인식이 의사학자인 김두종에게도 옮겨가게 되었다. 그 결과 김두종은 ①<일본서기>와 ③<일본의학사>를 인용하여 오나라 사람 지총이 고구려를 경유하여 일본에 의서를 전해주었다고 기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②<국사략>과 같은 역사기술을 보지 않고서는 '고구려를 거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주석대로 <일본서기>와 <일본의학사>만을 참고하였다면 김두종 역시 이능화와 견해 이상을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원류한 의학을 고구려가 배우고, 다시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적 가설을 약간의 문장 왜곡을 통해 일반화시킨 셈이 된다.
하지만 불필요해 보이는 '고구려를 거쳐'라는 표현을 넣은 것은 왜일까? 김두종이 식민사학자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지식을 많이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식민사관을 깨고 싶었던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제에 의한 교육을 받았다는 시대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일본인들에 의한 실증주의 역사기술보다 연대를 위로 끌어올려 조금이라도 일찍 시도된 것으로 적든가, 중국에서 원류한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는 가교 역할이라도 했다는 것으로 기술하고자 하였다.
지총이라는 인물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기록이다. 이름만으로 보면 덕래, 모치, 설총처럼 오나라 사람이 아니라 백제나 고구려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지총의 실존 여부, 지총이 고구려를 침략한 일본 장군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는 사실 여부, 그리고 고구려를 거쳐 갔다는 것 모두 입증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하지만 지총과 관련된 일련의 기술이 식민사관과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고대 의학사, 중의학의 동북공정으로부터 버텨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