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를 밝히는 대추와 석류와 골목꽃

[인천 골목길마실 63] 골목길 계단을 똑또그르르 구르는 대추 한 알

등록 2009.10.02 16:10수정 2009.10.0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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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해보다 이르다고 하는 한가위요, 주말에 낀 한가위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달력 들여다볼 겨를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엊그제에 이르러 비로소 한가위가 코앞에 닥친 줄 깨닫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이 한가위인지 몰라, 어제 낮 일찍 일을 마치고 한글학회를 나서는 길에 여쭈었습니다. "월요일에 나오나요?" "응, 나와야지." 어제가 수요일인지 목요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한가위가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 몰랐습니다. 요 며칠 거의 밤샘으로 일을 한 까닭에 9월이 끝났는지 10월이 열렸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시골에 가느니 부모님 댁에 가느니 하는 이야기는 마치 딴 나라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낍니다. 얼른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일이 그득그득 쌓여 있어서, 옆지기와 아기만 먼저 당신 부모님 댁에 어제 떠났고, 저는 인천에 남아서 이것저것 뒤치닥거리를 하는 한편, 한글학회 일을 붙잡습니다. 명절은 명절이라지만 한글날도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16층 호텔방에서 내려다본, 송도국제도시 도시축전 전시장 모습과 높이높이 치솟는 우람한 건물. 송도는 갯벌을 메워 시멘트철근 높은 건물과 아파트숲으로 만드는 새도시입니다.
16층 호텔방에서 내려다본, 송도국제도시 도시축전 전시장 모습과 높이높이 치솟는 우람한 건물. 송도는 갯벌을 메워 시멘트철근 높은 건물과 아파트숲으로 만드는 새도시입니다.최종규

그래도 어제 저녁은 퍽 오랜만에 친형하고 함께 지냅니다. 목포에서 혼자 살며 일을 하는 형이 모처럼 인천마실을 하면서 형 동무들을 만난다고 하기에, 옆지기는 처가에 늦게 와도 되니까 형하고 어울리면서 하루를 묵고 오라 이야기합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적 동무들을 만난 형 옆에서 서로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녁 열한 시가 될 무렵 형이 졸립다고 해서 잠자리로 찾아갑니다. 우리 집으로 가자 하지만, 형 동무들이 예약해 둔 호텔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기로 합니다. 예약한 호텔은 송도 국제도시에 있는 송도메트로호텔. 택시기사는 길을 잘 모르고, 네비게이션에는 호텔이 뜨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용케 찾아갑니다. 꽤 높은 호텔입니다. 둘레는 휑뎅그렁한 '공사판을 벌이는 벌판'입니다. 16층으로 올라갑니다. 도시축전을 한다는 전시장이 가까이에 내다 보입니다.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아 그런지, 꼭 장난감 같고, 천막 몇 주섬주섬 쳐 놓은 듯한 느낌입니다.

'살다 보니 호텔에서 잘 일이 다 있네. 태어나서 두 번째 호텔잠인가?' 하고 생각하며 깊이 잠듭니다. 며칠 못 이룬 잠이 한꺼번에 쏟아져 아주 달디답니다. 밤 사이 아기 기저귀를 가느라 깰 일 또한 없으니 아주 개운합니다. 아침을 호텔밥으로 먹은 뒤 형하고 택시를 타고 동인천으로 나옵니다. 형은 동무들을 다시 만나고 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형 동무가 사는 송월동1가 골목집부터 천천히 걷기로 합니다. 시골로 갈 분들은 일찌감치 시골로 떠나서 조용할 법한 골목길이지만, 큰집으로 있는 골목집은 복닥복닥입니다. 외려 명절날 복닥복닥한 골목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날에는 골목집 사람들이 옛 고향 시골로 갔다면, 이제는 인천 골목집이 고향이 된 분이 퍽 많아, '인천에서 태어난 딸아들(1950∼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들이 인천으로 돌아오겠구나 싶습니다. 1950년대나 이에 앞서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그러면서 골목집에서 내리 살아오신 분)은 인천이 고향이며 큰집일 테고, 모두들 다 자란 딸아들이 있거나 손주를 볼 나이가 되었겠군요.

 석류가 익는 골목길. 한가위가 너무 이르지 않았다면, 잘 익은 석류도 따서 차례상에 올릴 수 있었겠지요. (차례상에 석류는 안 올린다지만, 슬쩍 하나 얹어 놓아도 괜찮으니까요)
석류가 익는 골목길. 한가위가 너무 이르지 않았다면, 잘 익은 석류도 따서 차례상에 올릴 수 있었겠지요. (차례상에 석류는 안 올린다지만, 슬쩍 하나 얹어 놓아도 괜찮으니까요)최종규

'그래, 나도 인천에서 이루어지는 막개발에 따라 인천에서 쫓겨나지 않는다면, 내 딸아이가 인천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다른 도시나 시골에서 살림을 차리게 되면 인천으로 엄마 아빠 보러 오겠구나.' 열어젖힌 대문 안쪽에서 지짐이 굽는 소리와 냄새가 퍼져 나옵니다. 모처럼 잔뜩 늘어난(?)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기도 합니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쓸어 놓아 깨끗한 골목임에도 집 둘레로 꽃잔치를 펼쳐 놓은 할배는 빗자루를 들고 무언가 떨어진 쓰레기가 있나 하면서 비질을 합니다. 저잣거리 마실을 다녀온 할매는 머리에 지고 손에 들고 하면서 차례상을 바지런히 차리실 테지요.

"여보시오, 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어대시오?" 제가 사진 찍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할매 한 분이 묻습니다. "골목이 예뻐서요." "골목이 예뻐? 예쁜가? 글쎄." "이렇게 집집마다 꽃잔치를 벌여 놓으셨잖아요." "하기는. 그렇게 보면 예쁘기는 하지. 잘 찍으소."

 대추나무와 골목길. 대추나무 잘 여무는 골목길 한켠에서 골목 할배가 골목을 비질하고 있습니다.
대추나무와 골목길. 대추나무 잘 여무는 골목길 한켠에서 골목 할배가 골목을 비질하고 있습니다.최종규

골목길 비질을 하던 할배네 집에서는 석류가 자라고 있습니다. 소담스레 익어 가는 석류입니다. 손을 뻗치면 닿을 만한 높이입니다. 할배네 집 건너편에서는 대추가 익고 있습니다. 아직 덜 익은 대추가 있으나 잘 여문 대추도 보입니다.


송월동3가로 접어듭니다. 이곳에도 대추가 잘 여물고 있습니다. 그 옆 또 다른 집 대추나무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때, '똑또그르르' 소리를 내며 무언가 골목계단으로 굴러내려와 제 오른발을 톡 치고는 멈춥니다. 또 '똑또그르르' 소리를 내며 무언가 구릅니다. 사진찍기를 멈춥니다. 뭔가 궁금해 내려다봅니다. 엄지손톱만 한 작은 무언가 있기에 줍습니다. 대추알입니다. '누가 굴렸나? 절로 떨어졌나? 우리 옆지기가 대추를 좋아하는 줄 알고, 어디엔가 깃들어 있는 골목길 지킴이가 넌지시 선물 하나 베풀어 주었나? 한번 맛이나 보라는 뜻으로?'

 아직 안 익은 대추도 있으나, 알맞게 익은 대추도 있는 인천골목길입니다.
아직 안 익은 대추도 있으나, 알맞게 익은 대추도 있는 인천골목길입니다.최종규

한 시간 남짓 사진을 찍으며 골목을 걷다 보니, 어제 푹 자기는 했지만 다시금 졸음이 몰려듭니다. 며칠치 묵은 잠이 쏟아지려고 합니다. '오늘 바지런히 일산까지 가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북성동3가로 넘어서는 골목 한켠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립니다. '응?' 하면서 고개를 돌려 비탈길에 길게 잇닿은 골목집 안쪽을 슬며시 들여다봅니다. 온식구가 자그마한 마당에 둘러앉아 지짐이를 합니다. '오!' 살그머니 사진 두 장을 찍습니다. 더 찍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합니다. '소리로 듣고 코로 맡고 눈으로 보며 가슴으로 더 깊이 받아들이자. 사진찍기도 좋지만 사진으로 찍는 마음결을 좀더 알뜰히 삭이자. 더 나은 그림이 아닌 두근두근 콩닥콩닥 하는 즐거움을 손끝과 가슴결에 간수하자.'


송학동 2가와 3가를 거칩니다. 내동에 있는 우리 살림집에 닿습니다. 집으로 들어섭니다. 땀에 절은 옷을 모두 벗어던집니다. 몸을 씻고 빨래 석 점을 합니다. 방바닥에 드러눕습니다. 잠깐 일어나서 물 한 모금 마십니다. 더 쉬었다가 나머지 빨래를 마저 하고 집을 좀 치우고 밀린 일을 어서 끝내야겠습니다. 아까 골목에서 얻은 대추 한 알을 얼른 옆지기한테 갖다 주고 싶습니다.

 저잣거리 마실을 마치고 돌아가는 골목 할매.
저잣거리 마실을 마치고 돌아가는 골목 할매.최종규

 꽃잔치를 이룬 골목동네를 거닐다 보니, 거의 모든 집이 대문을 열어 놓은 채 '딸아들'이 '손주'와 함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꽃잔치를 이룬 골목동네를 거닐다 보니, 거의 모든 집이 대문을 열어 놓은 채 '딸아들'이 '손주'와 함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최종규

 자그마한 마당에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지짐이를 하는 골목집.
자그마한 마당에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지짐이를 하는 골목집.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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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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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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