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만에 찾은 광명의 세상

[한국어 교실 이야기 35] 한국어 선생으로서의 보람

등록 2009.10.08 10:33수정 2009.10.0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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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찌를 때 무슨 소리가 나지요?"
"'윽' 소리가 나지요".
"맞아요. 바로 그 소리가 'ㄱ'의 소리예요".
"아, 그렇구나. '윽' 소리는 아플 때 나는 소리구나".


모습도 한국 분이시고 한국 말도 유창하게 하시는 분이지만 70평생 한글 읽는 법을 배우지 못 하신 할머니께서 본교에서 실행하고 있는 '4일 안에 한글 떼기' 프로그램에 신청해 공부를 하셨다.

보통 이 프로그램에는 3학년 이상 되었지만 한글을 읽고 쓰지 못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지원을 하는데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따님을 통하여, 할머니께서 신청하신 것이었다. 전에도 한 3개월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읽을 수 없으셨다는 말씀에 의아해 하기도 했지만 그 의문은 할머니를 만나 뵙고 바로 풀렸다.

전에 가르치셨던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님이셨던지 같은 방법으로 할머니께 가르친 것이다. 아이들은 통글자로 그림과 단어들을 읽히면서 그 가운데서 한글을 터득해 나가곤 한다. 그래서 '감자, 가위, 가방' 등의 말에서 그 뜻과 더불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가'를 배우게 되고 거기에서 'ㄱ'의 음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들의 경우에는 이미 단어의 뜻들은 다 알고 있으므로 굳이 그런 방법을 쓸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석 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공부를 하셨는데도 결국은 못 읽게 되셨다는 것이다.

아직 한글을 읽지 못 하는 한국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할머니의 연세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성경책을 읽고 찬송가의 가사를 읽어서 부르고 싶으시다는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가르치는 4일 동안 그 동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가슴이 뭉클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다녀오셨는데 지하철을 탈 때에도 지하철역 이름을 읽을 수 있었으면 편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실 때에도 가사를 읽을 수 없으셨으니 거의 듣고 외워서 부르니 부를 수 있는 몇몇 곡 외에는 부르실 수 없었다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정말 힘들게 생활을 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세종대왕께서 한자를 읽지 못 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느끼셨던 안타까움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의 한글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여러 나라의 글자들을 모아 만든 로마자와는 달리 한글은 문맹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기가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문맹퇴치를 위해 힘쓴 사람들에게는 유네스코에서 '세종대왕상'을 수여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의 경우에는 외국인들이 배울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셨다. 이미 단어들을 알고 있기에 그 단어들을 사용하여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 단어에 해당하는 글자를 따서 자모를 읽는 것 또한 쉽지는 않았다. 'ㅐ'는 '애기'의 'ㅐ'라고 하니까 '개'의 경우에 '감자'의 'ㄱ'과 '애기'의 'ㅐ'를 합쳐야 하는데 할머니께서는 '감자'와 '애기'를 합치시려 하시니 어려우신 모양이셨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무리 어려운 복모음 혹은 복자음 글자라 하더라도 할머니가 족들의 이름에 들어간 글자들은 쉽게 읽어 내시고 할머니께서 많이 드신 모양인 소화제 '위청수'의 'ㅟ'는 아주 잘 기억해 내셨다.


자음과 모음은 그래도 나은 편인데 받침이 어려우신 모양이었다. 사실, 외국인들은 따로 받침을 가르치지 않아도 초성으로 배운 자음들을 사용해서 받침들을 읽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할머니의 경우에는 '각'에서 초성 'ㄱ'의 소리와 종성 'ㄱ'의 소리가 달라서인지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생각해낸 꼼수가 바로 받침 'ㄱ'은 끝이 날카로워서 칼 모양 같고 칼에 찌르면 '윽' 소리가 난다는 것에 창안해서 'ㄱ'이 받침으로 쓰일 때는 '윽' 소리가 난다고 한 것이다. 'ㄴ'은 'ㄱ'의 모양과는 달리 평평한 모양이므로 '은근하다'의 '은'의 받침 소리가 난다고 하였는데 '평평하다'의 '응' 소리를 기억하시거나 '고요하다'라고 비슷한 뜻으로 기억하셔서 웃음을 주시기도 했다.

이제 할머니는 또 다른 세상을 살게 되셨다. 프로그램을 마치면서 할머니께서는 '정말 고맙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성경책도 맘껏 읽으실 수 있겠다고 좋아하셨다. 이것이 바로 한국어 선생의 보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한글 #한국어 #어드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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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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