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회식 때도 영어만 써야 한다고?

[기획-영어? 직장인은 괴로워①] 진급 위해 한달간의 영어연수를 가다

등록 2009.10.18 16:14수정 2009.10.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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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서른 중반인 내가 영어를 처음 접해 본 것은 중학교 때였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많은 과목이 생겼고, 영어는 그 중 하나의 과목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영어는 내 발에 묶인 무거운 모래주머니 같은 존재였다. 이 모래주머니는 아마도 중학교 무렵부터 내 발목에 채워졌을 것이다. 다만, 무겁지 않고 익숙해서 그 존재를 자주 까먹을 뿐.

'듣기만 해도 점수가 올라간다'는 강의를 졸면서 듣다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는 그저 남들 하는 만큼은 했고, 94학번인 내가 대학에 다닐 시절만 해도 영어는 그리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공대를 다녀서인지, 영어보다는 수학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하고 본격적인 취업 시즌이 되면서 잊고 있었던 영어라는 모래주머니의 무게를 절감했다. 원하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영어 점수가 없으면 지원조차 안 돼 원서를 써보지도 못하는 상황이 온 것.

더 웃긴 것은 그 놈의 영어 점수가 단시간 내에는 절대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듣기만 해도 점수가 올라간다'는, 쪽집게 영어로 당시 유명했던 김00 강의를 들었다. 


너무나 유명한 강사인지라 강의 접수도 새벽 5시에 줄을 서서 겨우 겨우 했는데, 새벽 6시 강의는 말 그대로 졸면서 듣기만 했다. 그래도 정말 쪽집게이긴 쪽집게인지, 간신히 커트라인 점수를 턱걸이로 얻을 수 있었고, 지금의 직장을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턱걸이 토익점수 수명은 5년... 이젠 스피킹을 통과하라고?


 올해 다시 영어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지. 지금까지 해왔던 토익은 인정 안 해주고, 금년에는 토익스피킹만 인정해 준다고 한다. 불꽃 공부 끝에 받은 성적표. 일단은 홀가분 하다.
올해 다시 영어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지. 지금까지 해왔던 토익은 인정 안 해주고, 금년에는 토익스피킹만 인정해 준다고 한다. 불꽃 공부 끝에 받은 성적표. 일단은 홀가분 하다.이지용

그러나 최근 또다시 잊고 있던 그 모래주머니가 나의 발목을 무겁게 잡아당기는 사건이 있었다. 직장 생활 5년차 즈음인 지난해, 직장에서 진급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한 단계 위의 토익 점수를 요구하는 게 아닌가.

가지고 있던 영어점수(토익)는 턱걸이 수준이었기에 점수 인정 기간이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진급심사 2개월을 남기고 이 점수가 만료되어 버린 것이다. 죽기살기로 다시 진급에 필요한 영어 점수를 얻었지만, 나를 비웃듯 그 사이 영어 기준 점수가 다시 한 단계 높아졌다.

어쨌거나 올해 다시 영어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지. 지금까지 해왔던 토익은 인정 안 해주고, 금년에는 토익스피킹만 인정해 준다고 한다.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면, 다시 한 발 앞으로 도망가고, 그렇게 곧 손에 잡힐 듯한 진급은 점점 멀어지는 것인가.

이미 사회 초년병 딱지는 뗀 지 오래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진급이 갖는 의미는 크다. 아내도 부모님도 이제는 "언제 진급하냐"고 물어오기까지 한다. 진급을 못하고 있는 게 내 영어 점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그러게 내가 너 유학은 못 보내도 6개월 어학연수는 보내준다고 하지 않았니, 필요없다고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라고 옛날 이야기까지 풀어놓으신다.

그 스트레스를 어디 대놓고 말은 못하고, 영어 점수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기회는 왔다. 영어 공부라고 하면 혼자 인터넷 강의를 듣고 책만 파서 외우는 게 다였던 내가 회사에서 제공하는 영어 연수에 갈 수 있게 된 것. 영어 시험은 지지리도 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복은 조금 있던 모양인지, 바로 윗 선배가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를 영어 점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나에게 양보한 것이다.

하루 8시간 동안 영어로만 말하기... 회식까지도!

 하루 8시간 영어로 말해야 하는 시간이 지나면, 뒷골이 땡기면서 피로감이 확 밀려 든다. 수업은 그렇다 치고, 혹시 영어로 회식해 봤는가? 사진은 영화 <날아라 펭귄> 중 회식 장면.
하루 8시간 영어로 말해야 하는 시간이 지나면, 뒷골이 땡기면서 피로감이 확 밀려 든다. 수업은 그렇다 치고, 혹시 영어로 회식해 봤는가? 사진은 영화 <날아라 펭귄> 중 회식 장면.국가인권위

교육 기간은 8월 한 달. 업무, 집안일 등으로 시간 부족의 핑계를 대던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영어공부만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공식적인 교육시간인 하루 8시간 동안은 '오로지' 영어만 써야 한다. 쉬는 시간도 예외는 아니다.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나이기에 말 꺼내기가 더욱 쉽지 않았다. 영어에 신통치 않은 귀를 가진 나로서는 더 잘 듣기 위해 애를 썼으나, 원어민 강사의 질문을 받으면 엉뚱한 대답을 내놓기 일쑤였다.

이렇게 하루 8시간이 지나면, 뒷골이 땡기면서 피로감이 확 밀려 든다. 수업은 그렇다 치고, 혹시 영어로 회식해 봤는가? 회식 자리 정도는 편안하게 즐겨도 될 법한데, 이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물론 취한 상태에서 영어가 더 잘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영어 듣고 있으면 말도 안 되는 게 너무 많다.

암튼, 남들은 업무에서 해방되어 스트레스 받을 일도 적을 것 같다지만, 전혀 아니올시다다. 한 달 동안 짱 박혀 공부한다고 영어 실력이 얼마나 늘겠는가마는, 성적으로 그걸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회사 동료들 보기에도, 가족들 보기에도 덜 민망할 테니. 어쨌거나 한 달 합숙을 무사히 마치고 통과의례인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그립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겨우겨우 승진 조건 갖췄는데 내년에 또 바뀌면 어쩌지

회사에서는 몇 해 전부터 인건비 절감 차원으로 신입사원을 뽑는 대신 베트남 인력을 뽑아 일을 시키고 있다. 같이 해야 할 일도 많고, 가르칠 일도 많다. 영어 실력도 짧은데, 벵글리시(베트남인들이 쓰는 영어)까지 알아들어야 한다.

일을 시켜야 하니 영어로 문서를 써야 하고, 가르치려고 하니 영어로 얘기를 해야 하고, 베트남 현지에 있으니 영어로 채팅이나 메일을 써야 한다. 우리나라 신입사원이었으면, 바로 코치하고, 문서 보고, 바로 투입하면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 하나 설명을 해주어야 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영어로.

상황이 이렇다보니 회사도 국제화를 외치면서, 영어 점수뿐만 아니라 업무 전반에 걸쳐 영어 사용을 강요하는 추세이다. 필요가 아닌, 필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가정 생활, 사회생활 하면서, 영어 공부를 위해 장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쉽지 않고, 영어 부담 없는 잘 하는 동료들에 대한 부러움, 열등감이 때때로 힘들 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번 <도전골든벨>-베트남 특집에서 한국말 잘 하는 사람 많던데, 그런 사람을 뽑으면 안 되나. 더 효율적이고 능률적일 텐데. 그래도 얼마 전 받은 시험 성적표가 큰 위안이 되었다. 한 달 간의 '불꽃' 공부로 값진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 이제 승진 조건은 갖췄다. 근데, 내년에 승진에 필요한 영어 시험이 또 바뀌면 어쩌지?
#영어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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