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 처형된 후 한 가족 풍비박산났지만
40년 전 중정수사관·검사·판사는 말이 없다

[인터뷰] 고 권재혁씨의 장남 "사형제는 폐지해야"

등록 2009.10.12 19:17수정 2009.10.1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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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총책으로 몰려 교수형을 당한 권재혁씨(1967년의 모습으로 추정)

"이마에 혹이 두 개, 세 개 엄청나게 크게 달렸어요. 많이 맞아가지고... 비명소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40년 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총책으로 몰려 교수형을 당한 권재혁씨의 부인 이종식씨는 2007년 7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1968년 8월 중앙정보부 건물 복도에서 만난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권씨와 함께 중앙정보부로 압송된 이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이일재씨는 "조사내용이 자기들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구타를 하였고, 사실상 매일 구타를 당했습니다. 또한 한 달여 조사를 받는 동안 거의 잠을 재우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이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 13명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법원의 유죄 선고를 받았다. 특히 권재혁씨는 이듬해 9월23일 대법원(재판장 : 양병호, 대법원판사 : 김치걸·사광욱·홍남표·김영세)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40년이 지난 후 진실화해위 조사에 의해 사건 관련자들은 뒤늦게 누명을 벗고 국가권력의 가혹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지만, 권씨만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됐다.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황모 검사는 지난해 8월8일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지금으로 보면 허점이 많을 수 있는데 실제 간첩사건에서 물적 증거를 찾아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변명했다.

사건 당시 피고인들의 진술조서 작성에 관여했던 전직 수사관 장모씨는 "사람을 구타하고 그런 것이… 전부 다 그런 (구타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하다 보면 뺨이나 한 대 때릴 수 있을지도 몰라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고 잘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렸다.


어쨌든 진실화해위의 발표에 가장 기뻐하는 사람들은 고인의 유족이다.

고인의 막내딸 권재희씨는 81년 탤런트로 데뷔했지만, 비통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과거를 가슴 깊숙이 숨기고 살아야 했다.


장남 권병덕(학원 운영)씨는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사건 당시에는 충격이 컸는데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게 돼서 뭐라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 혼자 묘소 찾아가서 너무 억울해서 흐느낀 적도 있었어요. 그 사건으로 인한 피해의식이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컸다. 연탄가스도 맡아보고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의사가 내게 우울증 진단을 내리더라. 가족들이 한동안 아버지 묘소에도 못 갔다. 아버님 추모제를 지내게 된 것도 최근 3~4년의 일이다."

권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3남매를 키우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며 "내가 자살 시도했다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도 어머니는 시장에서 노점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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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5월 한국경제문제연구회 주최 수산업근대화를 위한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여한 권재혁씨(오른쪽). ⓒ 진실화해위원회


권씨는 "뒤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아버님이 이미 돌아가시니 그런 게 별 의미가 없더라"며 "사람이 하는 판결은 오심이 나올 가능성이 항상 있게 마련이니 사형제를 폐지하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권재혁씨의 유족은 조만간 법원에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다.
#권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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