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박타박 / 행상 나가신 어머니 / 날품으로 받은 / 짓무른 사과를 이고 돌아오는 길 / 미루나무 밑 길고 먼 길 // 개 짖는 소리 툭툭 건드리면서 / 해종일 마을에서 마을로 / 발등이 소복소복 부어 올랐다 / 사과나무 꽃은 언제나 / 어머니 등 뒤에서만 아름다워서 / 꽃이 지는지 잎이 지는지..."-80쪽, '사과꽃은 저 혼자 피고' 몇 토막
저기 야트막한 산자락을 억세게 보듬고 서 있는 저 사과꽃은 왜 저 혼자 피는 것일까. "행상 나가신 어머니"가 "날품으로 받은" 물러터진 사과를 머리에 이고 "미루나무 밑 멀고 먼 길"을 돌아 나오는 데도 아무도 바라보지 않아서일까. 하루해가 행상에 지친 어머니 부은 발등처럼 "소복소복 부어" 오르고 있는 데도 모두들 모른 척해서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사과꽃이 저 혼자 피는 진짜 이유는 "깜둥 치맛자락 떨치며 /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어머니보다 세월이 훨씬 더 앞질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과꽃이 피는 길이 자꾸만 흔들리는 것도 총알보다 더 빠른 정부의 시멘트 정책이 어머니 젊음을 하루가 다르게 사각사각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김채원은 어린 날 겪었던 가난과 서러움을 그저 모른 채, 언제 내게 그런 과거가 있었느냐 시치미를 뚝 잡아떼는 그런 얄팍한 시인이 아니다. 그이는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오래 아파하다가 그 멍에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이에게 있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예보다 나아 보이지 않는다.
미궁,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갈 수밖에 없다
"시간은 한 번도 나를 밀어주는 일 없이 내 손을 뿌리치며 달아나고...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다 그만, 불혹을 허리에 감습니다. 미궁의 문,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신비한 문의 그 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한 번 들어서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지만 지금껏 부르튼 길로 그 길을 헤맵니다."-'시인의 말' 몇 토막
지난 2002년 불혹을 코앞에 둔 나이로 <불교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 김채원(45)이 등단 7년 만에 첫 시집 <사과꽃은 저 혼자 피고>(시와문화)를 펴냈다. 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사과꽃은 저 혼자 피고'란 제목처럼 외롭고 가난하게 살았던 그 고향에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덧칠하고 있다.
제1부 '햇살로 엮은 붓 한 자루', 제2부 '고샅길 풍경', 제3부 '꽃그늘 아래', 제4부 '두고 온 날들'에 실린 흙, 간이역, 모래시계, 막걸리, 새벽밥, 냇가에 앉아, 고무신 한 켤레, 감자꽃, 감꽃, 칡꽃, 달맞이꽃, 민들레, 하모니카, 가마솥, 풍각 장날, 전깃불 들어오던 날, 상주 떡외할매, 추억 한 장 등 73편이 그것.
시인 김채원은 "시의 길은 시간의 미로처럼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한 번 들어서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라며 "시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처럼 순간 순간 나를 헛갈리게도 하지만 그 곳에 내 삶의 두레박을 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 소원은 쑥처럼 세상을 뚫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
나는 믿는다
이 땅의 눈물과 바람과
굳은 약속을
환한 것이 무슨 죄가 되랴만
이 봄날
눈부신 모든 것이 부끄럽다 -12쪽, '흙' 몇 토막
시인은 죄가 되지도 않는 환한 그 무엇이 왜 그리 부끄럽다는 것인가.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눈부신 모든 것'이 부끄럽다는 것일까. 이는 그동안 시인이 살아온 고단한 삶이 '환한 것'보다는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늘상 나무나 풀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어둑한 곳에서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흙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스스로를 사람들이 스스로 밟고 다니면서도 잘 느끼지 못하는 그저 그런 흙에 빗댄다. 아니, 사람들 길이 되고, 사람들 쉼터가 되기도 하고, 뭇 생명을 키워내면서도, 사람들이 그저 밟고 다니는 그런 흙 말이다. 시인은 실제로 어릴 때 그렇게 살아왔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시인이 그냥 멍청이처럼 가만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무조건 밟을수록, 아무렇게나 / 발길에 채이는 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시인 또한 퍼렇게 눈을 뜬다. 마치 이 땅을 뚫고 쑤욱 솟아오르는 쑥처럼 그렇게. '쑥'처럼 세상을 뚫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이 땅 곳곳에 퍼렇게 물들인다.
"눈물로 반짝이는 그 길"은 화엄의 길
어둠이 꿈틀거리는 꼭두새벽
골목 샛길을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빈 박스 뭉치만 뒤뚱거린다 -40쪽, '달팽이' 몇 토막
시인은 이른 새벽, "제 집을 등에 지고 / 맨몸의 달팽이가 밀고 간 / 외로운 길" 하나를 오래 바라본다. 문득, 시인이 살붙이 피붙이로 살던 고향을 떠나 야반도주하던 마을 사람들이 마치 제 집 등에 지고 맨몸으로 기어간 달팽이처럼 여겨진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었으면, 오죽 빚에 시달렸으면 야반도주를 했을까.
제 집을 등에 업고 맨몸으로 달팽이가 기어간 그 쓸쓸한 길... 그 길 위에는 "골목 샛길을 삐걱거리는 바퀴소리"도 들리고, 신기하게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 빈 박스 뭉치만 뛰뚱"거리는 모습도 아프게 사라진다. 그 길 위에는 어렴풋이 "희붐하게 / 비녀 찌른 흰 머리칼, 바람 일렁거리며 / 납작한 손수레 하나" 사라지는 모습도 보인다.
"눈물로 반짝이는 그 길." 그 길이 마침내 시인 눈에 슬픈 "화엄"의 길로 보인다. 왜? 그때 야반도주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고향에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도 이제 곧 정부의 '4대강 죽이기'인지 '4대강 살리기'인지 때문에 쫓겨나거나 낙동강 주변에 있는 논밭을 모두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과거 속에서 현실을 비추다
둥글다
어깨 위로 한 세상을 열고 있는
아버지의 도리깨질
장단으로 들려오는 어린 날의 안마당
일시에 떨어진 꼬투리가 고단하게 눕는 안마당 -102쪽, '콩타작' 몇 토막
그래도 시인의 아버지는 어린 날 안마당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콩타작을 하고 있다. 시인의 눈에 아버지가 콩타작을 하기 위해 도리깨질을 하는 모습이 "어깨 위로 한 세상을 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번지르르한 4대강 살리기 사업,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는 그 사업이 콩꼬투리가 되어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때 문득 시인의 눈에 아버지의 그 도리깨질에 우수수 떨어지는 콩깍지 속에 "아버지의 덜 여문 시간"도 함께 떨어지는 것만 같다. 여기서 "아버지의 덜 여문 시간"이란 끝내 고향을 지키지 못하고 억지로 떠나야만 하는 아버지의 아픈 생이기도 하고, 아직은 정부와 맞붙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마을 사람들 하루하루이기도 하다.
시인 김채원의 이러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새롭고도 야무진 용기와 희망을 꿈꾸는 시편들은 이 시집 곳곳에 쑥처럼 푸르게 푸르게 돋아나 있다. "구정물투성이 가슴을 /눈웃음으로 / 그저 가라앉히면"(섬진강 풍경)이라거나 "아직도 물바닥에 남아 있을 / 흑백사진 한 장"(수몰지구), "물음표 같은 나날 / 서로 견디자며 / 도란거리며 부여잡으며"(고무신 한 켤레) 등이 그러하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용락은 "김채원 시인의 시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유년시절 추억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달리 말하면 김채원 시인의 시적 상상력의 원천은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추억이라 할 수 있다"며 "그 아프고 아린 추억을 성장하여 현실생활 속에서 아름답게 해원해 나가는 과정이 이 시집의 요체"라고 평했다.
어릴 때 겪었던 쓰라린 가난과 어두웠던 기억을 부끄럼 없이 끄집어 내 지금 돌아가고 있는 현실에 해인(海印)처럼 비추어보는 시인 김채원은 196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2002년 <불교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현대불교문예원, 대구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2009.10.14 15:43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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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은 저 혼자 피고
김채원 지음,
시와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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