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팔려온 그녀들, 도망치면 '불법인간'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대한민국 이주노동자 보고서 권리' 보고서 발표

등록 2009.10.21 11:40수정 2009.10.2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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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1일 오전 10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주노동자 보고서 기자회견에서 노마 강 무이코 국제 앰네스티 동아시아담당 조사관이 인권상황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 하단에 펼쳐진 것이 이번에 나온 보고서다.

21일 오전 10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주노동자 보고서 기자회견에서 노마 강 무이코 국제 앰네스티 동아시아담당 조사관이 인권상황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 하단에 펼쳐진 것이 이번에 나온 보고서다. ⓒ 권박효원


2008년 9월 정부 "연말까지 불법체류자를 20만 명 선으로 감소" 발표.
                  미등록 이주노동자 체포 2만9906명, 50% 증가. 매달 수천명 단속.       
        11월 한나라당 이주노동자 임금 중 식비·숙박비 차감하는 최저임금법 제출.

같은 해     임금체불 이주노동자 3269명 발생. 전년도에 비해 3배 증가.
                 이주노동자 관련 산재 5221건 발생. 전년도에 비해 상해 32% 증가.

지난 2004년 고용허가제를 시행하면서 아시아에서 최초로 이주노동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 인권국가 대한민국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임금 체불, 강제 노동, 구타에 성적 착취를 위한 인신매매까지 부끄러운 사례들이 다양하게 드러났다.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이하 앰네스티)가 21일 발표한 대한민국 이주노동자 권리 보고서의 제목은 '1회용 노동자'였다. '인간'이 아니라 쓰고 버려지는 '노동력'으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보고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노마 강 무이코 앰네스티 동아시아 담당 조사관은 "고용주가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인권침해를 저지르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착취를 참아가며 등록 노동자로 남거나 도망쳐 미등록 신분이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고 밝혔다.

특히 이주노조 지도부에 대한 표적단속과 관련, 앰네스티는 "대한민국 헌법 및 국제법에 의해 보호되는 기본적 노동권을 박탈하려는 시도"라고 비난했으며, 노조 지도자들을 "노동권을 평화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다는 사실만으로 구금된 양심수"라고 평가했다.

이날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이주노동자는 안전장비 없이 위험한 화학물질이나 중장비를 다룬다. E-6 예술흥행비자로 입국한 여성들은 계약과 달리 술시중을 들거나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 이런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사업장을 이탈하면 이들의 신분은 '미등록' 소위 말하는 '불법인간'으로 바뀐다.


손발 부러져도 일했다, 그러나 잘렸다

a  노마 강 무이코 국제 앰네스티 동아시아담당 조사관.

노마 강 무이코 국제 앰네스티 동아시아담당 조사관. ⓒ 권박효원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내국인과 차별을 받지 않는다. 법에 따라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를 당하면 배상도 받을 수 있고, 결사의 자유 및 단체교섭·단체행동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사업장을 3번만 변경할 수 있고 2달 안에 재취업하지 않으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성희롱·폭력·임금차별 등을 당해도 쉽게 직장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앰네스티 측과 인터뷰한 필리핀 출신 A씨는 크리스마스 하루 휴가를 요구했는데, 결국 휴가 다음날 바로 해고당했다.

스리랑카 출신 B씨는 작업 중 발가락 5개와 손가락 2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다. 두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지만 12일째 되는 날 사장이 해고하겠다고 협박하자 다시 출근을 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결국 사장은 고용비자를 취소했다.

E-9 비자를 받은 여성들은 계약과 달리 미군에게 술을 팔아야 하고, 그렇게 해서 받은 월급도 매니저에게 빼앗긴다. 필리핀 출신 C씨는 클럽에서 가수로 일하는 줄 알고 한국에 왔지만 고용주는 남자고객들과 성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했다. C씨가 이를 거부하자 고용주는 그를 때리고 욕하면서 "필리핀으로 보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러나 앰네스티 측을 만난 출입국관리소와 법무부 관계자들은 "인신매매 케이스를 한 건도 접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앰네스티는 "출입국관리소는 왜 이 여성들이 도망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한국에서 인신매매는 좁은 의미로 이해된다"면서 "경찰은 여성들이 성관계를 강요당하기 전에 도망치면 인신매매가 아니라고 생각해 수사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왜 한국 정부는 인신매매 몰랐나

앰네스티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번 보고서에서 앰네스티는 "대한민국 정부가 단속정책을 계속 시행함에 따라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주변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앰네스티가 조사 과정에서 만난 정부 관계자와 이주노동자들은 단속 상황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펼쳤다.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지역주민들 뜻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앰네스티 측이 만나본 이주노동 활동가나 고용주들은 오히려 "이주노동자 단속 때문에 지역경제가 나빠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난해 11월 마석 집중단속과 관련, 출입국관리소는 앰네스티 측과의 면담에서 "구급차를 대기시켜두었고 다친 사람이 없기 때문에 후송된 사람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앰네스티는 마석이나 다른 단속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사건들을 보고서에 기록했다.

앰네스티 측이 만난 방글라데시 출신 D씨는 마석 단속 과정에서 지붕에서 떨어져 양다리를 다쳤다. 단속반원들은 그에게 수갑을 채웠고 5시간이 지나서야 병원에 데려갔다. 앞서 2008년 9월 버마 출신 노동자 D씨가 외국인보호소에 이송되던 중 가슴통증을 호소했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결국 단속 13시간 뒤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출입국관리소는 앰네스티 측에 "체불임금을 돌려받으려는 이주노동자들을 결코 강제출국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앰네스티가 마석 단속에서 체포된 이주노동자 7명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모두 체포 일주일만에 본국으로 강제출국됐으며 출입국 직원들에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a  경기도 남양주시 외국인근로자복지센터는 지난 2007년 10월 12일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마석가구단지를 방문해서 다문화 가정 이주여성 및 이주노동자들과 기념촬영한 사진으로 달력을 제작했다. 이명박 후보와 기념촬영을 한 이주노동자와 촬영은 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었던 이주노동자들 중에서 여러명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화된 단속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추방되었다. 빨간 원안 인물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단속에 의해 추방된 이주노동자들이며, 여성들은 한국인과 결혼한 뒤 가정을 이룬 다문화 가정 주부들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외국인근로자복지센터는 지난 2007년 10월 12일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마석가구단지를 방문해서 다문화 가정 이주여성 및 이주노동자들과 기념촬영한 사진으로 달력을 제작했다. 이명박 후보와 기념촬영을 한 이주노동자와 촬영은 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었던 이주노동자들 중에서 여러명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화된 단속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추방되었다. 빨간 원안 인물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단속에 의해 추방된 이주노동자들이며, 여성들은 한국인과 결혼한 뒤 가정을 이룬 다문화 가정 주부들이다. ⓒ 권우성


3년만에 다시 보고서 만든 까닭... "개선점이 있었더라면"

이날 앰네스티는 한국 정부에 ▲이주노동자 고용 사업장 조사 및 처벌 ▲이주노동자 인권침해 진정기구 설립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과정에서 법적 보호 ▲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노조 설립·가입 권리 보장 등을 요구했다.

또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국제노동기구의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 '단결권 및 단체교섭에 관한 협약',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을 비준하라고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지난 2006년과 2008년 인권이사회 선거 공약에서 "비준을 고려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번 보고서 작성을 위해 앰네스티는 지난해부터 네 차례에 걸쳐 60명이 넘는 이주 노동자, 이주노동자 인권활동가, 고용주 등은 물론 한국 출입국관리소·법무부·노동부·외교부 관계자들과도 면담했다.

지난 2006년에도 앰네스티는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고용허가제 인권침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무이코 조사관은 "그 뒤 개선점이 있다면 이번에 다시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도 이주노동자 체불임금이 산업연수생 제도 때보다 높아지는 등 착취 관행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앰네스티가 다시 후속 보고서를 낼지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지만, 한국 이주노동자 인권상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예정이다. 무이코 조사관은 "보고서 발간뿐 아니라 인권의식 향상과 문제점 개선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이주노동자 #국제 앰네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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