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어, 지금 당장 와'

[여행기중독자 23] 필 쿠지노의 <성스러운 여행 순례 이야기>

등록 2009.10.21 14:34수정 2009.10.2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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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 문학동네

책 표지 ⓒ 문학동네

'T.S 엘리엇'의 말마따나 우리가 여행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정보'보다는 '지식'이고, '지식'보다는 '지혜'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란 무엇일까?

 

그것은 때로 커다란 깨달음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주 작은 부스러기들일 수도 있다. 그 작은 부스러기들이 모여 하나의 모양을 이루는 순간 여행자는 세상을 다시 보게 되기도 하고, 커다란 깨달음을 통해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절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막상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여행의 미덕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 떠난 여행이 허탈하게 끝나는 이유도 여행의 미덕을 몰라서가 아니다.

 

'다들 훌훌 털고 떠나는데 왜 나는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여행기들을 보면 다들 감동적인 여행을 하는데 왜 나의 여행은 그렇지 못할까?'하는 의문이야말로 여행기중독자의 최대 관심사인 바, '필 쿠지노'의 <성스러운 여행 순례 이야기>는 여행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책이었다.

 

여행의 문턱에서

 

이 책의 원제 "The Art Of Pilgrimage"를 그대로 옮기자면 '순례의 기술', '순례'라는 개념을 폭넓게 적용하면서 여행이 어떻게 순례가 되는지, 순례가 어떻게 지혜를 탄생시키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성스러운 여행 순례 이야기>는 여행에서 더 깊이 느끼고, 더 넓게 보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과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감동의 부스러기들을 총망라한 '순례자 로망 백서'라고 할 수 있겠다.

 

순례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고, 내용도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다. 하지만 일생을 여행가로 살아온 저자의 여행담도 흥미롭거니와, 방대한 문헌에서 가려 뽑은 인용구들 하나하나가 너무도 강렬하여 가야할 곳,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넘치게 만든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분들, 실망스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허탈감에 빠진 분들, 긴 여행길 도중에 여행의 의미를 상실하고 멍 때림에 빠진 분들, 특히 여행기를 쓰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이 책 한번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 때, 아무 쪽이나 펴서 읽어도 '종교와 예술과 여행'이 한 지점에서 조우하는 시적인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와 순례자는 같은 영역에 있는 영적인 여행자들이며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샴쌍둥이들처럼 그들은 세상을 직접 경험하려는 욕망의 신경조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순례는 적당한 분위기가 생겨나기를 기다리지 않으며, 시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순례여행은 지금 당장 이루어질 수도 있고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에로스의 존재 없이는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도 없기 때문이다. "

 

순례

 

먼저 '순례'의 의미를 잠깐 살펴보자. 순례(pilgrimage)라는 말은 라틴어인 '페르 아그룸(per agrum, 들판을 가로질러)'에 어원을 둔다. '들판'은 '고난'으로, '가로질러'는 '무언가를 찾아'로 확대된 결과, 순례는 '자신의 신성한 중심, 성자나 영웅이나 신에 의해 성스러워진 곳을 찾아가기 위한 힘든 여행'을 의미하게 되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순례의 개념은 속성은 종교적이되 목적은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여행으로 확장되었다. 이제 우리는 특정한 주제를 찾아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느끼는 여행을, 휴식이 아닌 감동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순례'라고 부른다.

 

(어원을 살펴 본 김에 여행을 뜻하는 두 단어 'travel'과 'journey'의 어원도 알아보자. 'travel' 이라는 단어는 '노고'를 뜻하는 '트라베일 travail'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트라베일'은 중세시대의 '고문대'인 '트리팔리움 tripalium'이 변형된 결과이다. 한편 'journey'는 불어의 'jour(하루)'에서 파생된 말이다. 각각 체험과 시간을 강조하고 있다.)

 

열망과 부름

 

이 책은 순례를 일곱 단계로 나누고 있다. '열망', '부름', '출발', '길', '미궁', '도착', '은혜로운 선물'. 저자는 우리가 여행의 매 단계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고,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순례의 시작은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다(여기엔 '열망에 대한 열망'도 포함된다). 여행의 시작이 출발이 아니라 열망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이 새삼스레 인상적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여행기중독자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나 실패한 여행을 하게 되는 이유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기중독자가 여행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용기의 부족이 아닌 열망의 부족에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 서로 다른 순례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강렬한 목적, 즉 중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부름에 응답하려는 정신의 소망이다. 그 소망이 환희를 예고하건 고뇌를 예고하건 간에. 순례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여행 뒤에 숨은 열망이다. "

 

여행을 꿈꾸되 열망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신성한 여행을 떠나기 어렵다. 여행자는 무언가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준비를 통해서만이 자신이 가야 할 곳과 그냥 지나쳐 가야 할 곳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열망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 그 열망이 우리의 마음속에 드러나는 방식을 소상하게 파헤친다. 이 책만의 매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대목이다. 마치 "당신의 열망은 이 중에 어떤 모양인가요?"하고 묻는 것 같다.

 

그것은 저자가 어릴 적에 이집트와 앙코르와트의 사진을 보며 품었던 '신비로움'이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느꼈던 '자연과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이며, 일본의 방랑시인 바쇼가 '언뜻 본 어렴풋한 빛'이라고 말한 '성스러운 기운'이다. 환경론자인 존 보튼에게 그것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연속성'이었으며, 이슬람 신비주의의 대 시인 메블라나 루미에게는 '갈망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열망에 휩싸인 여행자는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가 된다. 아픔의 현장을 직접 가봐야만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것 같고, 누군가가 걸었던 그 길을 직접 걷고 나서야 생각이 명확해질 것 같은 열병에 시달리게 된다.

 

저자는 이 단계를 '부름'이라 부른다. 부름의 장은 이 책에서 가장 낭만적이다. 이 인용구 하나로도 그 부름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을 실감할 수 있으리라.

 

" 프랑스의 시인 쥘 쉬페르비엘은 세상이 뜻밖의 가능성으로 달라지는 이 나른한 순간을 기술하면서 그의 시 <부름 THE CALL>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깊은 잠 속에서 누군가가 내게 속삭였다.

너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어. 지금 당장 와.' "

 

출발, 길, 미궁, 도착

 

저자는 '출발'의 장에 들어서면서 낭만적인 어조를 거두고 냉정해 진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순례에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영적 준비를 소개한다. 출발 전 행하는 특별한 의식들, 순례자들의 체험담, 짐 꾸리기, 그리고 신성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자세에 담긴 깊은 의미를 되짚는다.

 

"출발하기 전에 여행의 목적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제부터 미온적인 행동이나 멍한 생각, 목적 없는 나날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여행은 생각의 깊이에 따라 신성해 진다... 이제 이상적인 삶을 살 시간이다."

 

여행의 매 단계에 이렇게 과도한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안락한 집을 버리고 위험을 감수면서 시간과 돈을 들여  순례를 떠날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디 여행뿐이랴. 미온적인 행동, 멍한 생각, 목적 없는 나날은 인생의 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의욕과잉에 의한 경직된 태도도 인생과 순례의 적이기는 마찬가지. 순례자에게는 뒤를 잘 잠그되 언제나 마음을 열어놓는 태도가 중요하다. 저자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목소리를 빌어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강조한다.

 

" 우연히 발견할 소지를 남겨놓지 않으면 신성함을 찾을 수 없어.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모험의 시작은 길을 잃는 것이야. - 조셉 캠벨 "

 

출발을 하고 나면 '길'과 '미궁', '도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장들은 전 세계의 수많은 순례자와 순례지의 향연이다.

 

노자와 에픽테투스, 이븐 바투타는 물론, 갤런드의 <어둠에 대한 열망>, 힐레어 벨록의 <로마로 가는길>, 에드윈 번바움의 <종교 백과사전>, 테오필 고티에의 <스페인 방랑>, B.J 잭슨의 <폐허의 필요>, 알렉산더 엘리엇의 <땅, 불, 물, 바람>, 마쓰오 바쇼의 <먼 곳으로 이르는 좁은 길>, 헨리 베스톤의 <가장 먼 집>, 조셉 캠벨의 <살아있는 신화>, 구름의 순례자 위안 홍타오, 괴테와 로르카와 네루다, 여행을 노래한 밴 모리슨... 실로 여행기중독자를 미궁에 빠뜨릴 정도로 방대한 듣보잡 여행기가 펼쳐진다. 새로운 순례지를 찾는 여행자들의 '알카즈네(보물창고)'다.

 

저자가 이 방대한 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기나긴 순례 길에서는 고난과 어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의 실마리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 걷는 기술, 믿음의 기술, 우연한 발견... 모두 순례자가 벗으로 삼아야할 덕목들이다.

 

" 고금의 영웅들이 우리보다 앞서 갔기에

미궁은 이제 완전히 다 열려져 있다.

우리는 단지 영웅들이 갔던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끔찍한 것을 찾으리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신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죽이리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이다.

밖으로 여행하리라 생각했던 곳에서

자신의 존재 한가운데로 오게 될 것이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 조셉 캠벨 "

 

은혜로운 선물

 

순례는 도착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의 언어'는 증발된다. 번뜩이는 직관이야 오래도록 선명하겠지만, 무언가 발견 될 듯 말 듯 어렴풋이 명멸했던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가 집을 떠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작음 기쁨과 겸허한 경험을 '지금 이 순간의 언어'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은혜로운 선물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심오한 것은 어렵게 얻은 지혜이다."

 

저자는 순례자의 미덕이 달뜬 감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얻은 지혜를 나누는데 있다고 말한다. 여행의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가 열망했던 그 무엇을 돌이켜 보고, 여행길에서 마주했던 시련에 대해서까지도 감사하며, 신성한 기억을 삶의 일부로 만드는 일, 그리고 다음 여행자를 위해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순례의 종결이다.

 

기록의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회상은 순례자와 시인과 여행자의 마지막 훈련이다. 여행자는 기억하는 연습을 통해 아름다운 순간들을 포착하고 상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또 여행자는 자신을 변화시킨 힘의 정체를 명확하게 앎으로써 새로운 열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니, 그렇지 않고 한 번의 변화에만 계속 매달린다면 '황금을 지키는 늙은 용'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하다못해 기록은, 커다란 지혜를 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찾기 위해 고분분투를 벌였다는 증거가 된다. 여행기중독자가 여행기를 순례하는 이유도,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잊을지도 모르지만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생각할 것이라고. - 사포 "

 

그대는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

 

여행은 허망하고, 개별적인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열망과 지혜는 개별적일지언정 결코 공허하거나 허망한 것이 아니다. <성스러운 여행 순례 이야기>는 열망과 지혜를 한껏 강조함으로써 순례여행이 세심하게 계획되고 평가될 수 있는 여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신성한 열망을 품고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사람은 모두 순례자이다. 다소 뜬금없더라도 순례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말을 나누고 싶다. 우리는 결코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고, 우리의 순례가 결국 신성한 원을 그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자고. 이것이 순례자의 로망이요, 생존법일 테니.

성스러운 여행 순례 이야기

필 쿠지노 지음, 황보석 옮김,
문학동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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