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352)

― '한흑구의 1930∼40년대 작품' 다듬기

등록 2009.10.22 10:21수정 2009.10.22 10:21
0
원고료로 응원

 

-  한흑구의 1930∼40년대 작품

 

.. 국보급 문화재를 산야에 내버려 두고 돌보지 않는 것은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한흑구의 1930∼40년대 작품을 원고지에 옮겨 적으면서 그런 생각을 문득 해 보았다 ..  《민충환 엮음-한흑구 문학선집》(아시아,2009) 17쪽

 

 '산야(山野)에'는 '산과 들에'나 '아무 데나'나 '함부로'로 다듬어 줍니다. "돌보지 않는 것은"은 "돌보지 않는 일은"이나 "돌보지 않는 모습은"으로 손질하고, '후손(後孫)'은 '뒷사람'이나 '우리'로 손질합니다.

 

 ┌ 한흑구의 1930∼40년대 작품

 │

 │→ 한흑구가 남긴 1930∼40년대 작품

 │→ 한흑구가 쓴 1930∼40년대 작품

 │→ 한흑구가 이룩한 1930∼40년대 작품

 └ …

 

 보기글을 살피면서도 느끼지만, 우리 나라에는 여러 계층 여러 계급 여러 신분 말이 있구나 싶습니다. 여느 사람 여느 말이 있는 가운데, 있는 사람 있는 말이 있고, 가진 사람 가진 말에다가 높은 사람 높은 말이 있습니다. 배운 사람 배운 말이 갈리고, 우쭐대는 사람 우쭐대는 말이 있습니다.

 

 잡지사에서 글 하나 써 달라고 해서 보내 주었더니, 제가 '예전'이라고 적은 낱말을 '기왕(旣往)의'로 고칩니다. '책을 팔다-책을 사다'라고 적은 말투를 '도서(圖書)를 구매(購買)하다-도서를 판매(販賣)하다'로 바꾸어 놓습니다. 잡지 엮은이는 제가 쓴 책을 일러 주면서 "최종규의 책 무엇무엇"이라고 적는데, "최종규 책 무엇무엇"이나 "최종규가 쓴 책 무엇무엇"처럼 적는 모습은 아직까지 거의 못 보았습니다.

 

 옆지기가 아침에 자연건강 모임 잡지를 읽는데, 모르는 낱말이 있다며 물어 봅니다. "'하수'가 뭐예요?" "응? 무슨 하수?" 잡지를 넘겨받아 들여다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화기계 전체가 하수(下垂)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 하고 적혀 있습니다.

 

 저로서도 알 길이 없습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로는 "[의학] = 처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느 사람들은 '처지다'라 하는 낱말을 '의학을 배운 분'들은, 또 '전문가라 하는 분'들은 '하수'라 말하는 셈이고, 이렇게 한글로만 적어 놓으면 알아먹기 힘들 테니 고마웁게도(?) 한자로 '下垂'를 밝혀 주신 셈입니다.

 

 자, 이렇게 한자를 밝혀 주셨으니, 기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요?

 

 ┌ 한흑구가 1930∼40년대에 쓴 작품

 ├ 한흑구가 1930∼40년대에 남긴 작품

 ├ 한흑구가 1930∼40년대에 이룩한 작품

 └ …

 

 옆지기가 보는 책 가운데에는 《소식의 위대한 힘》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연건강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텐데, 이 책이름에서 말하는 '소식'이란 "알리려는 이야기(消息)"가 아닌 "적게 먹음(小食)"입니다. 알리려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한자 '消息'을 아는 분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한자를 모르는 사람 가운데 '소식'이라는 낱말을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니까, 한자말 '소식'은 한자말이 아니라 우리 말인 셈입니다. 한글로 적어 놓기만 해도 넉넉하며(한글로만 적어 놓고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우리 말입니다), 따로 한자를 알아야 할 까닭이 없고(따로 한자를 밝혀야 하는 글이라면 따로 알파벳을 밝혀야 하는 글과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글줄과 말마디는 우리 말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익히 쓰고 즐겨쓰는 낱말이거든요.

 

 이와 달리, "적게 먹음"을 가리키는 '소식'은 우리 말이 아닙니다. 한자로 치자면 "알리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消息'이 사람들한테 어렵고 낯설다 할 테지만, 사람들한테 낯익고 손쉬울 만한 '小食'이기에 널리 쓸 만할까요? 한자를 안 밝히면 알아챌 수 없는 낱말을 의사나 박사나 지식인들이 쓰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한자는 중국글입니다. 이 중국글을 일본이 받아들여 널리 쓰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지식 계급이 기꺼이 쓸 뿐입니다. 여느 사람한테는 쉬 다가오거나 느끼기 어려운 글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과 생각에 따라 우리 말과 글로 "적게 먹는 놀라운 힘"이라든지 "적게 먹기로 얻는 대단한 힘"이라고 이야기를 펼쳐야 우리 뜻과 마음을 한결 넉넉하고 알차게 나눌 수 있습니다.

 

 ┌ 한흑구 님이 1930∼40년대에 한 땀 한 땀 일군 작품

 ├ 한흑구 님이 1930∼40년대에 힘껏 펼친 작품

 ├ 한흑구 님이 1930∼40년대에 온힘 쏟아 이룬 작품

 ├ 한흑구 님이 1930∼40년대에 이룩한 빛나는 작품

 ├ 한흑구 님이 1930∼40년대에 일군 아름다운 작품

 └ …

 

 말마디가 아름답자면 생각마디가 먼저 아름다워야 합니다. 생각마디가 아름답자면 우리 삶마디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루하루 일구는 삶이 아름다운 가운데, 우리가 늘 품는 생각을 아름답게 북돋우고, 우리 생각을 아름답게 북돋우니 우리 말과 글을 저절로 아름답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마디며 삶마디를 아름다이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면, 제아무리 글치레를 하고 말치레를 한다 한들 아름다운 말과 글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겉치레와 겉발림으로 말과 글을 꾸민다 하여 아름다운 말과 글로 다시 태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좀 높은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해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얕본다면, 또 내가 좀 배웠다고 덜 배우거나 적게 배운 사람을 업신여기고 있다면, 또 내 주머니가 두둑하다고 주머니가 홀쭉한 사람을 깔본다면, 내 삶이란 어찌 되겠습니까. 재주가 없는 사람 앞에서, 힘이 여린 사람 앞에서, 가난한 사람 앞에서, 어리숙하거나 고단한 사람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과 매무새로 서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말과 글로 우리들 어떤 생각과 뜻을 우리 둘레 사람들한테 나누려고 합니까. 우리는 어떤 말과 글로 우리가 발디딘 이 삶터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0.22 10:21ⓒ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2. 2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3. 3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4. 4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5. 5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