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에 장애가 있더라도 긴 머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팔에 장애가 없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짧은 머리로만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의 색깔은 정말 다르다. 사진은 영화 '블랙'
블랙
오랫만에 만나는, 나보다 몇 살 작지만 중년의 그녀는 가을냄새를 물씬 풍겼다. 올 가을 몇 십 년만에 독신생활을 깨고 좋은 님 만나 결혼할 날을 받아서 그런지 무척 좋아보였다. 사랑을 하면 예뻐지는 것은 20대나 40대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외모를 보면서 항상 경탄하는 부분 중 하나가 물결치면서 목을 덮고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과 그 머리 위에 항상 쓰는 다양한 모자다.
사실 나도 30대 중반까지는 머리카락을 기르고 다녔다. 그러나 아이들을 차례로 낳고 기르면서 긴 머리가 점점 관리하기 어려워지고 관리하지 못하는 머리는 생기가 없어 보여 그 때부터는 항상 단발 머리 상태다. 모자는 옛날이니 지금이나 유난히 작은 얼굴이라 어울리지 않아 못쓰지만......
그녀의 밝은 밤색 긴 머리칼에 유독 경탄하는 이유는 그 머리 스타일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가족의 정감 덕분이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빗지 못한다. 두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 두 손 중에서도 손가락 한 두 개 간신히 움직일 정도라 일상 생활은 두 발로 거의 한다. 세탁기 돌리거나 프라이팬에 전을 부치거나 모두 발로 한다. 그녀의 입술도 발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중요한 집게 역할을 한다.
오징어부침을 해서 손님을 접대하는 날은 아들이 칼을 잡고 도마에서 오징어를 잘게 썬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십대 한창 청년의 익숙한 도마질이 청승맞겠지만, 내 눈에는 그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긴 머리칼이 그녀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나오는 것은 그녀의 아들과 딸의 사랑 덕분이다.
마치 듣지 못하는 나 때문에 아이들이 말을 하기도 전에 울리는 전화를 자동으로 받거나, 누가 집으로 오는 초인종소리가 들리면 자동으로 대문으로 기어나가며 나의 두 귀 역할을 한 것처럼. 그리고 또래들에 비해 유별나게 언어구사력이 뛰어나 오히려 그것들이 성격과 재능과 무관한데도 오해를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그녀의 아이들도 자연히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엄마의 두 팔과 손 역할을 하며 살았다. 팔에 장애가 있더라도 긴 머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팔에 장애가 없고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데도 짧은 머리로만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의 색깔은 정말 다르다.
가족에게 거추장스럽게 여겨지는 여성장애인들의 머리는 한결같이 짧다. 더러는 차마 짧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삭발형태 머리인 장애아가씨들도 있다.
비록 자기 머리를 스스로 빗고 다듬을 수 없지만 따스한 가족의 사랑이 있다면 원하는 형태 머리와 옷을 고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자기가 원하는데도 번거롭다는 이유 하나로 여자다운 멋스러움을 아예 꿈꾸지 말아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지역에서는 그런 장애아가씨들끼리 모여사는 그룹 홈들이 한 두개 생겼다. 그룹 홈 관리는 가톨릭수녀회가 주축이지만 지역사회 엄마들과 직장여성들이 따스한 가슴을 나누어 일반 가정과 같은 그런 자매애 속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졌다.
해마다 그런 그룹 홈들을 점차 늘리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모두가 하고 있을 때, 새 정부 들어서 갑자기 장애인들을 위한 대규모시설을 많이 만드는 것으로 정책이 바뀌어서 안타깝다.
긴 머리와 짧은 머리 뿐만 아니라 구두와 운동화, 또는 바지와 치마, 빨간색과 노란색의 속옷을 선택하는 것에서 느끼는, 영혼의 자유로움이 주는 여성만의 작은 행복을 간과하는 정책들은 누구를 위한 정책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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