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방값 모두 공짜인 고시원이 있다고?

소외계층에게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오윤환씨

등록 2009.10.26 19:02수정 2009.10.2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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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깁고 좁은 고시원 통로. 그 끝의 희망을 잡기 위해 사는 이들이 있다.
깁고 좁은 고시원 통로. 그 끝의 희망을 잡기 위해 사는 이들이 있다.나영준

'고시원'이란 단어에서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저소득 혹은 소외계층, 나 홀로 족, 일용직 근로자들…. 그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간 우리 사회에 고시원이 자리 잡은 이미지에는 다소 어두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탁 트인 실내와 반짝반짝한 개인용 욕실, 고사양 컴퓨터로 무장된 이른바 원룸형 고시원들이 속속 등장, 일부 고시원이 보여줬던 '쪽방' 개념에서 탈피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나아지긴 해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완전히 벗어나긴 힘들다. 여전히 고시원을 이용하는 이들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25만 원 내외면 방과 전기, 수도, 난방 등이 해결되고, 때로는 밥과 김치 정도지만 어느 정도 굶주림은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직장에서 밀려나고, 집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쉽게 찾아드는 곳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 사람이 간신히 몸을 누일 공간. 어슷비슷한 방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길고 좁은 복도. 과연 그 좁은 길을 지나면 다시 희망의 끈을 붙잡을 수 있을까. 아니 그마저도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이들은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할까.

갈 곳 없는 이들에게 무료인 고시원이 있다고?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에 위치한 '금촌 고시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눈에도 깨끗이 정리 된 실내가 펼쳐진다. 운영자의 마음가짐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고시원 다른 어느 곳과도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갈 곳 없는 이들에게 '무료'로 방을 내어준다는 것.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부 할인'도 아닌 무료라니? 혹시 이곳, '쉼터' 등의 사회단체가 아닐까. 하지만 아니다. 어디까지나 엄연히 고시원이란 간판을 단 사업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식의 운영이 가능할까.

"살다보니 세상에는 문제가 있는 분들이 많더군요. 가출 청소년, 가정불화로 한밤에 쫓겨난 주부들, 긴 수형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내디딘 분들…."


그 해답은 쾌활한 목소리의 오윤환(57) 원장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지난 2002년부터 고시원을 운영해 왔다는 오 원장은 당장 밤이슬을 피할 곳도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정성스러운 식사. 일을 나가지 못한 이가 휴게소에서 PC를 즐기고 있다.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정성스러운 식사. 일을 나가지 못한 이가 휴게소에서 PC를 즐기고 있다.나영준

게다가 단순히 방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 먹는 것과 똑같은 형태의 따뜻한 밥까지 제공한다. 밥도 비싸다는 교하 쌀만 쓴다. 거기에 매일 고깃국을 끓여내는 것은 물론 입맛을 고려해 2가지 국을 제공한다. 반찬도 일반 가정에서 제공하는 것과 같고, 아예 음식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 두 사람을 따로 쓴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 집 식구 밥은 굶기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하지만 철칙은 있다.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만 제공하는 것. 처음에는 세 끼를 모두 제공했지만, 그러다보니 아예 일을 나가려 하지 않는 이들이 생겨나더라는 것. '내가 저들을 돕는 게 아니라, 게으르게 만드는구나'란 자각이 생겼다고 한다.

아무튼 이 정도면 일반 이용자들에게 받는 요금이 비싸지 않을까 싶지만, 다른 곳과 비슷한 25만 원이다. 봉사도 좋지만 이건 시쳇말로 '밑지는 장사'가 아닐까. 그런데 넉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방이 50개인데, 늘 차는 것은 아니니까요. 남는 방을 쓴다고 보면 되죠. 거기에 식비나 전기·수도·가스비 정도인데… 큰돈은 안 들어갑니다."

과연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런 식의 원가를 계산할 것이 아니라 25만 원이라는 매출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자, 다시 웃음이 돌아온다.

"생각하기… 나름이죠. 비어 있다고 생각해야죠. 빈 방을 돈으로 보기 시작하면 어렵죠. 돈이 있다고 봉사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봉사란 부단한 연습과 노력의 결과, 나는 아직 멀었다

가정불화가 해결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주부, 기술을 배워나간 근로자들. 오랜 수형생활로 사회에 문을 걸어 잠갔지만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여는 이들. 이런 모든 이들이 이곳을 경영하게 하는 힘이란다. 물론 장기수 등을 비롯해 신상에 대한 비밀은 철저히 지켜진다. 때문에 일반 이용객들은 다른 곳과 차이점을 알 수 없다. 드나듦이 잦아 일일이 숫자를 세긴 어렵지만 가정 불화로 집을 나온 주부들만 매달 1~2명꼴이라고 한다.

이런 오 원장도 때로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슬며시 사라지는 이들을 볼 때면,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하고 섭섭한 감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가더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착하잖아요. 이곳에서 더 신세를 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니까 살짝 사라지곤 하지요. 사실 생각해 보면 미안해서 간 거거든요. 인사는 잘 됐을 때 받으면 되지요."

 봉사란 부단한 연습과 노력의 결과하고 말하는 오윤환 원장.
봉사란 부단한 연습과 노력의 결과하고 말하는 오윤환 원장.나영준

우문현답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봉사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수 없이 많은 세월 동안 연습을 하지 않으면 힘들다고 봅니다. 돈 만원을 기부하라고 하면 누구나 힘듭니다. 하지만 10원, 100원짜리로 수없이 연습하면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몇 천, 몇 억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 '참 연습 많이 하고, 노력 많이 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비하면 저는 멀었지요."

이곳저곳에 어려운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 '왜 내 눈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만 보일까?' 고민에 때론 머쓱한 웃음을 짓기도 한다는 오 원장. 사실 큰돈이 안 들어간다는 그의 말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소문은 빠르다. 소식을 들은 많은 힘들고 지친 이들이 그를 찾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경영에 돌아간다. 특히 겨울이 되면 큰 적자가 날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 그래도 가끔 기억을 하고 과일 한 상자를 사들고 오는 이들이 있어 감사하다며 환히 웃는다.

"누구나 자신이 어려웠을 때 모습은 감추려고 하죠. 그걸 알기 때문에 사실 저는 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물가물한 기억 끝에 있는 이들이 가끔 오죠. 잊으려 했다가도 사람인지라 고맙고 뿌듯하기도 합니다. 그런 보람으로 하는 것 아닐까요."
#금촌 고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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