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접어든 작가의 사랑... 그로 인해 변화된 글

[서평]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등록 2009.10.26 18:56수정 2009.10.2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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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민음사 ⓒ 윤석관

▲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민음사 ⓒ 윤석관

J.M.쿳시. 200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 번밖에 수여되지 않는다는 부커상을 2회나 수상한 최초의 작가라고 한다.

 

이 책의 옮긴이는 그를 두고 '살아 있는 영어권 작가 중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처럼 유명한 작가의 글을 읽고 이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번역 상의 길다란 문장도 몰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나 문학에 바친 전 생애의 결정체를 몇 가지 화두로 풀어내고 있는 에세이는 참으로 고역이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힘에 부치는 활동이었다. 그의 생각들을 마주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내공이 얼마나 부족한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왜 그의 글을 만족스러울 정도로 이해하지 못했을까? 왜 이 책이 위대한지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서 생각해본다. 그를 위대하게 평가했던 많은 평론가들은 과거에 출간되었던 그의 전작들을 통해서 함께 사유하고 소통하는 기회가 있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쿳시라는 작가는 여느 작가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외국인 작가의 한명이고 아무런 이유없이 집어든 책의 한권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쉽지 않은 에세이 집착하지 말자

 

아마도 에세이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에세이의 성격과 자신이 사유하는 방식을 두고 그는 염세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정적주의. 혹은 무정부주의적 정적주의적 염세주의. 혹은 염세주의적 정적주의적 무정부주의라고 말한다. 다소 지금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두고 단순히 권력 이양의 문제라고 한다. 국가를 두고 패거리들로 시작된 집단이라고 한다. 경쟁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를 내비친다. 제논과 지적설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마치 장자가 우리와 같은 시기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즉, 수학자체가 인간이 창조해낸 도구이므로 불완전하고, 신이 아니라도 어떤 존재가 이 땅에 여러 생물체를 만들어내지 않겠느냐? 라는 의견들은 염세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정적주의적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사상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에세이를 읽다가 반 정도는 포기했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의 독특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래 단락의 두 수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흐름이 깨지곤 했지만, 읽어나갈수록 3가지의 에세이가 교묘하게 연결되면서 벌어지는 변화가 책 속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작가 세뇨르C. 와 타이피스트 안야와의 관계

 

세뇨르와 안야. 첫 만남 당시 그들의 심리상태는 상당히 동물적이고 본능적이었다. 세뇨르는 안야의 엉덩이를 보면서 성욕을 느꼈고, 안야는 그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더 부채질하기 위해 일부러 엉덩이를 씰룩씰룩 거렸다. 그러면서 '니가 그러면 그렇지'라며 무시하고 있는 안야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처음에는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세뇨르에게 있어 여인의 육체는 단순히 눈요깃감이고, 안야에게 있어서 눈앞의 노인은 유혹과 놀림의 대상이었지만 글을 통해서 전달되는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의 교류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성적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이런 영향은 세뇨르가 써나가는 '강력한 의견들' 이후 '두 번째 일기'라는 글에서 포함되는 감성적인 주제로서 표현된다. 세계를 이해하는 '의견들'이 아닌 세뇨르를 이해할 수 있는 '의견들'이 있었으며, 그렇게 둘은 '플라토닉 사랑'의 관계로 발전한다. 비록 육체적인 사랑을 하지는 않지만 어느새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

 

동거녀 안야와 펀드매니저 앨런의 관계

 

이 둘의 관계는 '돈'이라는 능력과 '육체'라는 매력이 얽혀있는 커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앨런은 안야에게 일을 하지 않아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었고, 안야는 앨런에게 성적매력을 가진 이상형이었다. 그는 그녀를 마음껏 탐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이에 노년의 세뇨르가 등장한다. 앨런은 세뇨르의 글을 반대를 위한 반대로 폄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앨런은 그의 컴퓨터에 몰래 칩을 이식하여 그의 돈을 빼돌릴 궁리를 한다. 이런 앨런을 바라보면서 안야는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안야는 앨런의 추악한 참 모습을 세뇨르로 인해 깨닫게 된다. 현실적으로나 이상적으로나 앨런은 퉁명스럽고, 불만스럽고, 반쯤 취한 목살이 축 늘어진 중년의 오스트레일리아 백인 남자. 그 상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가 내게 준 것

 

단지 세뇨르의 입을 빌린 쿳시의 사상이 옳기 때문에 안야가 세뇨르를 선택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안야가 세뇨르를 '변태 늙은이'로 바라보지 않고, 정신적인 동반자로 존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세뇨르의 가슴까지 치고 올라오는 성적욕구를 끝까지 절제하고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연애를 하거나 남녀를 만날 때면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 남자가 아니면 이 여자가 내게서 원하는 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교감인지 말이다. 특히 젊은 시기에는 이런 쾌락적 요소에 더욱 집착하는 면을 보인다는 글을 읽은 듯도 싶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는 이성을 서로를 대할 때,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우선시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 쿳시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나중에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혹시 나처럼 이 책을 제일 먼저 읽었는데, 쿳시라는 작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기를 멈추고 그가 저술한 여러 작품들을 먼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 후에 맨 위에 있는 에세이의 글들을 다시 읽어본다면 지금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난 아직 이 책의 맛을 전부 느끼진 못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10.26 18:56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민음사, 2009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민음사 #단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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