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걸어온 길, 혹은 아쉬운 관광자원

[통영의 '길' ①] '용문달양' 해저터널

등록 2009.11.01 17:34수정 2009.11.0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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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해저터널은 '길'이며 '관광자원'이다 ⓒ 정용재

통영 해저터널은 '길'이며 '관광자원'이다 ⓒ 정용재

 

도서관이나 서점의 여행 코너 같은 곳에서 뽑아든 책이 혹시 도시, 특히 대도시를 다룬 책이라면, '서울의 옛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볼 수도 있다. '옛 길'이란 뭘까 하고 들여다보면, 사실 그게 별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래 걸어온 길, 그리고 오래 전에 조성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길이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성을 가진 길이라고도 하겠다.

 

'통영의 옛 길'이라고 말한다면, 어디를 들 수 있을까. '역사성을 가진 길'을 들어 보자면 다른 답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용문달양' 해저터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신작로를 따라 해저터널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이 터널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 벌레 한 마리 없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벽도 바닥도 천장도 온통 콘크리트로 굳어진 곳, 인실은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오가다는 선 채 인실을 내려다본다. 열병에 걸린 것처럼 인실의 얼굴은 새빨갰다."

 

고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일부이다.

 

지금이야 터널 안쪽에 조명도 깔끔하고, 벽면에 설치된 홍보 패널들은 화려할 정도이지만, 작품의 배경 시대인 일제치하에는 아무래도 지금과는 좀 다른 느낌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해저터널의 역사성'은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설령 그 역사가 아픔의 역사라 하여도, 역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통영 해저터널은 한국문학사의 걸작에 등장한 곳이라지만, 사실은 좀 삭막하다고 할 정도로 심심한 곳이다. '토지'에 그려져 있듯, 해저터널은 '온통 콘크리트로 굳어진 곳'이었다. 지금도 별 차이는 없다. 터널 내부 벽면에 시 관광홍보 패널이 환하게 붙어있고, 입구에 관광안내 부스가 있는 통영의 관광자원이지만, '온통 콘크리트'인 해저터널은 통영 주민이 오래 걸어온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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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해저터널은 문화재청 등록 근대문화유산이다 ⓒ 정용재

통영 해저터널은 문화재청 등록 근대문화유산이다 ⓒ 정용재

 

이제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 된 오래된 길 입구에서, 오랜 시간을 걸어온 사람들을 만났다.

 

"오늘 시에서 나왔능가 동에서 나왔능가 노인들 모아가 점심밥을 주데, 버스 대절까정 해가 밥 묵고 와가 요 나와 앉아 안 있나."

 

도천동 사신다는 할머니들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해저터널 입구는 도천동 동네 어르신들의 소일 장소가 되어왔다. 할머니 발 아래 편히 늘어진 강아지 한 마리, 역시 도천동 주민이다. 오가는 여행객들 모두 강아지에게 한마디씩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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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터널 입구는 인근 주민들의 쉼터이다 ⓒ 정용재

해저터널 입구는 인근 주민들의 쉼터이다 ⓒ 정용재

 

할머니들에게 인사하고, 벽도 콘크리트, 바닥도 콘크리트인 길을 좀 걷는데 딱, 딱 하고 장기알 놓는 소리가 벽을 넘어 들린다. 예전에는 터널 입구쪽에 평상을 놓고 동네 어르신네들이 모여 앉아 장기를 바둑을 두며 소일했다는데, 관광 관계 공무원들의 요청으로 그 자리를 눈에 좀 덜 띠는 곳으로, 터널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옮긴 것이다. 관광객들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 옮긴 것이라 하는데, 어쩌면 필요한 일이고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다만 옮긴 자리에 그늘이 모자란다는 점이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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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터널은 통영사람들 생활속의 길이다 ⓒ 정용재

해저터널은 통영사람들 생활속의 길이다 ⓒ 정용재

 

오래된 길인 해저터널이지만, 해저터널은 지금도 살아있는 길이다. 해저터널은 지금도 통영 시민들이 애용하는 길이 되고 있다. 여름에 덜 덥고 겨울에 덜 추운 길, 해저터널은 봉평동 미수동과 당동 도천동을 연결하는 길이다. 터널을 걷다 보면, 시간대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침에는 용화사 미륵산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걷고, 오후에는 하교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외지에서 오신 손님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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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 박대규씨와 김상혁씨가 해저터널 홍보 패널을 보고 있다 ⓒ 정용재

여행객 박대규씨와 김상혁씨가 해저터널 홍보 패널을 보고 있다 ⓒ 정용재

서울에서 오신 여행객 두 분을 만났다. 박대규(36)씨와 김상혁(36)씨 일행이다.

 

"처음엔 문화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본 해저터널이었는데,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이라는 데에서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이지만, '길'이기도 한 통영 해저터널인 것이다. '문화재'이면서 '일상의 길'이라는 두가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이 해저터널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객들과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 이야기는, 해저터널이라는 말만 들었을 때 상상한 이미지와 실제로 본 해저터널과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근대문화유산'인 통영 해저터널의 원형을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하에, 외지 손님들이 가진 이미지와 실제의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서울 손님들이 통영 관광지도를 얻어간 터널 입구 안내부스에서, 통영을 위해 자원봉사하는 시민 한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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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터널 앞 관광안내 부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통영시민 박미령씨 ⓒ 정용재

해저터널 앞 관광안내 부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통영시민 박미령씨 ⓒ 정용재

 

지역 봉사단체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임' 회원인 박미령씨다. 주말에는 관광해설사가 부스를 담당하고, 주중에는 봉사단체의 20여 명 회원들이 교대하며 관광도우미로 활동한다고 한다. 

 

"해저터널에 대해서, 통영 시민만의 시각이 아닌 외부자의 시각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저터널과 해저터널을 연계한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 새로운 생각과 과감한 아이디어가 필요한데, 통영 내부의 관점에서는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이다. 또한 박미령씨는, 통영시민과 인근 주민들이 해저터널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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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인 해저터널은, 보존을 위해 오토바이나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 정용재

근대문화유산인 해저터널은, 보존을 위해 오토바이나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 정용재

 

우리의 '용문달양' 해저터널은, 문화유산이며 관광자원이다. 또한 통영시민과 인근 주민이 오래 걸어온 길이다. 언젠가 어느날 갑자기 해저터널이 길로서의 기능을 중단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정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해저터널이 문화유산과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게 될 수도 있다. 사람들 일상 속의 길이기 때문이다. 관광자원이며 생활속의 길이라는 두가지 정체성이 반발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길로서의 가치를 위해, 그리고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위해서 말이다. 그 둘 모두 통영시민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려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통영 #해저터널 #통영여행 #통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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