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아래 있으니까 마음이 참 편해"

[이란 여행기 41] 카림칸 성 시트러스 나무 아래서 에너지를 충전한 작은 애

등록 2009.11.02 11:47수정 2009.11.0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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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칸 성을 갔을 때의 하나는 다른 때와 좀 달랐다. 항상 활기가 있고 에너지가 넘쳤는데 이때는 좀 지쳐 보였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혼자서 조용히 자신의 내면과 만나고 싶어하는데 하나는 시트러스 나무 아래서 자신에게 충실했다. ⓒ 김은주


밖보다 안을 좋아하는 큰 애는 꾀를 부렸습니다. 숙소 침대에 엎드려 <나니아 연대기>를 읽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면서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카림 칸 성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약 먹을래?"
"아니, 괜찮아. 방에서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


약을 먹자는 나의 제안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지면서 극구 사양하는 큰 애의 표정을 보면서 꾀병이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순간 엄청난 속도로 머리 컴퓨터가 작동했습니다. 큰 애를 억지로 끌고 다음 일정인 카림 칸 성으로 가느냐, 아니면 원하는 대로 방에 두고 작은 애와 둘이서 나가느냐, 두 가지 길 중에서 손익을 열심히 계산했습니다. 

나가기 싫어하는 큰 애를 데려가면 분명 짜증을 부릴 테고 그러면 많이 힘들어질 것 같았습니다. 또 억지로 구경하는 것보다는 방에서 쉬는 게 큰 애에게도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숙소 프런트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여학생 기숙사 사감처럼 다소 엄격해 보이는 아가씨라는 것도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큰 애에게 문을 잠그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작은애와 함께 거리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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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카림 칸 성. 흙벽으로 된 성이다. 형태 또한 땅딸막해서 친근한 이미지를 풍겼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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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칸 성 바로 앞에서 축구를 하고있는 이란 남자들. 신의 나라 이란에서도 축구는 대중 스포츠였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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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칸은 잔드 왕조 때 페르시아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많은 볼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스테인글래스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 김은주


쉬라즈 시내를 10분 쯤 걸어서 마침내 카림 칸 성에 도착했습니다. 카림 칸 성은 잔드 왕조 때  카림 칸이 세운 성으로 쉬라즈의 중심인 쇼헤다 광장에 있습니다. 카림 칸이 이 성을 세울 당시 쉬라즈는 페르시아의 중심이었고, 그러니까 카림 칸 성은 지방의 일개 성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역사를 간직한 중요한 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중심이었던 성 치고는 규모가 좀 작았습니다.

허나 흙벽으로 된 성은 친근감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차가운 느낌의 돌이 아니라 따뜻한 느낌의 흙으로 돼 있다는 게 그런 인상을 풍기고, 또 성의 생김새가 위로 높게 솟기 보다는 옆으로 낮게 퍼진, 즉 땅딸막한 인상이었기에 더욱 친근한 이미지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카림 칸 성은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사이는 흙벽을 바른 형태인데, 14미터 높이의 둥근 기둥 가운데 어떤 기둥은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처럼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이 기둥이 비록 삐딱하게 서있기는 하지만 매우 견고하다고  합니다. 강진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성 앞은 잔디밭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어떤 연인들은 데이트를 즐기고, 소풍을 나온 가족도 보입니다. 축구를 하는 남자들도 보였습니다. 축구를 하는 남자들의 몰입과 역동성이 좋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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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칸 성 안 뜰. 시트러스 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데, 숲에 들어왔을 때의 맑은 기운과 안정감을 주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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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러스 나무 아래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작은 애. 나무 아래 앉아있으니까 마음이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했다고 했다. ⓒ 김은주


300토만을 내고 카림 칸 성으로 들어가자 식물원에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성 안마당에는 시트러스 나무로 가득했습니다. 귤처럼 노란 열매가 달려 있어서 귤인 줄 알았는데 땅에 떨어진 걸 하나 주었는데 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을 보자 하나는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시트러스 나무숲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성한 시트러스 나무 때문에 안이 잘 안 보여서 안에서 무었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시트러스 열매를 줍고 있는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귤나무 속으로 하나를 찾으러 들어갔을  때 귤나무 속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하나의 모습은 참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는 모습은 어른에게나 어울리는 모습이며, 또 에너지가 넘치는 하나에게는 절대로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예상외로 기운이 다 빠진 노인네 같은 모습으로 귤나무 아래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보자 좀 계면쩍은 듯 말했습니다.

"여기 앉아있으니까 너무 좋아. 마음이 참 편안해져. 난 나무하고 자연이 좋아."

이 말도 하나에게는 참 낯선 표현이었습니다. 어린 애가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다니, 그럼 다른 때는 안 편안했단 말인가,  하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해했습니다. 하나의 에너지가 바닥난 것이라고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선희가 집 안에서 조용히 자신의 내면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나 또한 조용히 멈춰있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한비야씨의 책에서, 여행을 다니다가 에너지가 고갈될 때는 집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에너지를 충전했다는 걸 봤는데, 에너지 넘치는 하나 조차도 에너지가 바닥났고, 그래서 시트러스 나무 아래서 충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난 하나가 에너지를 열심히 충전하도록 배려한 채 혼자서 카림 칸 성을 둘러봤습니다.

ㅁ자형의 건물에는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카림 칸 성이 비록 부잣집 저택보다도 규모가 작긴 하지만 한때는 페르시아의 중심이었던 곳이라 많은 유물이나 볼거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안내책자에서 적극 추천한 카림 칸 성의 모형도 보았고, 이 성의 주인인 카림칸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사신을 접대하는 관경을 전시한 방도  구경했습니다. 이밖에도 사진과 유품이 전시된 채 박물관도 관람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알록달록한 창문입니다. 색유리로 장식한 스테인 글라스 창문은 바닥에 환상적인 무늬를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마법의 성을 방문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바닥난 애들을 떼놓고 혼자 다니는 것도 나름대로 매력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유로웠습니다. 애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애가 딸린 엄마들은 언제나 등에 짐을 한 짐 지고 있는 기분이거나 다리에 족쇄를 차고 있는 기분을 갖게 되는데 본의는 아니지만 애들 없이 다니니까 아가씨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여하튼 하나와 나에게는 카림 칸 성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하나는 시트러스 나무 아래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기분을 경험했고, 난 아가씨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린 둘 다 카림 칸 성을 아주 좋게 기억합니다.
#쉬라즈 #카림칸 성 #시트러스나무 #스테인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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