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상황, 한국교회 그리고 비판

비판은 사실에 기반하고, 공익을 겨냥한다

등록 2009.11.03 08:23수정 2009.11.03 08:23
0
원고료로 응원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은 내게 '이제 한국정치에 관심두지 말고 이민생활이나 잘 적응하라'고 권유한다. 또 어떤 분들은 '비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해진다'며 가급적 비판을 삼가라고 권한다.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는 권유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하면서 먼 고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진들 그리 개인적으로 유익할 리가 없다. 비판을 하는 것보다 현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거는 쪽이 훨씬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은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의 다른 이름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경우라면 비판할 동기가 사라지고 만다. 무관심한 대상에 대하여 누가 비판을 하겠는가?

물론 비판은 확고히 공익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확고한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 공익이 아닌 사리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음흉한 모략이 되고, 또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비방이나 비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정치에 대한 비판,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모두 나름 내 방식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내가 45년 이상을 살아왔던 대한민국에 대하여 어떻게 순식간에 애정을 접을 수 있겠는가?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몸담았던 교회에 대하여 무슨 수로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헌법은 엄중하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민주국가로서는 영 체통이 서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 중에 한 대목이 기억에 있다. "전직 대통령이 존경받는 풍토를 만들겠다."는 대목이다. 그동안 끝없이 이어지던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불행한 모습들이 이제는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곧장 국가기록물 유출 건으로 흠집을 내더니 마침내 가족들과 측근기업인의 돈거래를 빌미로 친인척은 물론 중병에 신음하던 측근들조차 모조리 사법적 가해를 당했다. 결국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정권을 잡고 곧장 지난 정권이 했던 모든 일을 무위로 돌리는데 그야말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남북관계나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그렇고,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토목공사가 그렇다. 권력기관의 독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종시의 백지화 움직임도 그런 맥락의 일환이다.

자신들은 지난 10년간 마음껏 비난의 자유조차 누렸지만 이제는 비판적인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뉴스에서 퇴출된 신경민 앵커, 시사토론의 정관용씨, 백분토론의 손석희씨, MBC PD수첩 관련자들, 가수 윤도현, 방송인 김제동등 모두가 시청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권에 밉보여서 쫓겨났다. 지난 정권에서 유인촌, 이덕화, 백일섭, 김흥국 등 모두가 거리낌 없이 활동하던 것에 비교해볼 문제이다.

미디어 관련법의 처리과정에서는 민주주의의 사망을 보는듯한 느낌마저 든다. 야당의원들의 의결권을 강압으로 막았고, 자신들끼리는 서로 대리투표를 하는 등 차마 민주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이렇게 절차법을 어기며 처리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국회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또 매우 비겁하고 우스운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의결과정에서의 문제는 많았지만 결과를 무효로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절차적 결격이 있는 법률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앞으로 국회법은 지킬 필요가 있을까? 600년 전 경국대전을 근거로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을 무효로 했던 판결처럼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판결이 또 하나 탄생하였다.

헌재의 판결에 대한 패러디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당선은 되었지만 대통령은 아니다.'라거나 'BBK를 설립은 하였으나 내 것은 아니다.'하는 식이다. 또 '강간과 폭행은 했지만 범죄는 술이 저질렀다.'거나 '선거법을 위반했지만 당선은 유효하다.'는 등 온통 헌재와 사법부를 불신하는 조롱이 담겨 있다. 심지어 '헌재가 판결은 했으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고 신랄하게 헌재의 결정자체를 빗댄 패러디도 있었다.

행정부의 권력에 대한 불신이 있다면 국회가, 국회도 믿을 수 없다면 최소한 사법부는 균형자적 역할을 해줘야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국민의 절망감은 점점 더 깊어가는 것이다.

이제 국민들도 눈치를 살피며 생각을 감추기에 바쁘다. 10월 28일에 있었던 재보선의 결과에서 나는 국민들의 마음을 보았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50%를 넘어 청와대가 자축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재보선의 결과치고는 여당의 대참패가 아닐 수 없다. 그 간의 여론조사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국민들이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겨왔던 것이다.

언론은 연일 집권세력의 비위를 맞추는데 여념이 없다. 언론이 권력과 유착을 형성하는 것은 그 사회에 비판기능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비판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할 뿐 아니라 패망을 향해 질주하는 폭주기관차에 다를 바가 없다.

비판받지 않아서 부패한 전형적인 예가 종교에 있다. 가톨릭은 절대 권력을 향유하며 부패했었다.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생겨난 종교였으나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신도들과 엄격히 구분된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바빴다. 자신들이 스스로 신이 되어 면죄부를 팔아먹는 등 타락이 극에 달하며 종교개혁 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을 주도한 자들의 동기를 의심하는 설도 있지만 그렇게 가톨릭의 부패에 대한 반향으로 신교가 탄생하였다. 성직자와 신도를 계급으로 분류하여 엄격히 속박하고 비판을 막아온 결과물이 극악한 부패로 나타났다. 또 자신들의 부패상을 감추기 위해서 마녀사냥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신교는 또 어떤가? 특히 한국교회 다수의 목회자들은 부패에 침묵하였으며, 독재 권력에 영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하는데 몰두하였다. 거대한 교회건물이 그 자체로 기득권이 되고 신도들은 비판할 자유를 잃었다. 심지어 목회자가 무고한 사람들을 저주해도 "아멘"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성서에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사랑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말씀이 비판하는 입을 막는데 동원되고 있다. 교회의 잘못, 목회자의 잘못, 심지어 교회 내 다른 신도들의 잘못을 덮고 쉬쉬하자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비판이 횡행하면 교회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임을 이해는 하지만 비판을 막기 위해서 동원할 말씀은 아닌 것이다.

결국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입을 막아놓고 자식들에게 거대한 교회건물과 부동산과 기득권을 세습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출석 신도수와 헌금액수를 계산하여 교회를 사고파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여신도와 간통하다 들통이 나자 도망가다 떨어져 죽는 일까지 생겼다. 또 기독교인들이 똘똘 뭉쳐서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는 모습도 비판해야 될 일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거든 비판에 직면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로마통치와 식민지 유대민족의 통치자들에 통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율법을 숭상하는 바리새인들을 참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일갈하던 모습은 여인의 간통을 비호한 것이 아니라 다중의 죄와 무자비하고 부당한 처벌을 비판하는 장면이다. 종교개혁도 잘못에 대한 비판에서 가능한 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절실히도 비판이 가해져야할 대상이다. 이민생활이 고달프지만 내가 나서 자란 조국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심할 수가 없고 뿐 더러 그리 옳은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갈수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고 부패를 재촉하는 균주처럼 변하는 것을 외면하고 사는 것도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다.

사익을 추구하기에는 비판이 장애가 될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애정이 있다면 썩어서 뭉그러지기 전에 비판하는 것이 옳다. 허물어지는 민주주의를 그저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점점 부패하여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모하는 교회를 보고 기도만 하고 앉아 있어도 변화는 없다.

사랑한다면 비판하자. 그러나 인신공격이나 허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비방이나 비난을 하지는 말자. 철저히 사실에 기반을 둔 비판, 철저히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비판,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애정 어린 비판이 우리사회를 좀 더 사람 사는 세상에 가깝게 하는 것이 아닐까? 비판은 돌을 던져서 상대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고 애정을 담아 더 나은 지향점을 모색하는 일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호주에서 발행되는 주간 코리아타운에도 기고하였으며 다음 주말판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호주에서 발행되는 주간 코리아타운에도 기고하였으며 다음 주말판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한국정치 #헌재판결 #한국교회 #기독교 #비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7년 만에 만났는데 "애를 봐주겠다"는 친구
  2. 2 아름답게 끝나지 못한 '우묵배미'에서 나눈 불륜
  3. 3 스타벅스에 텀블러 세척기? 이게 급한 게 아닙니다
  4. 4 '검사 탄핵' 막은 헌법재판소 결정, 분노 넘어 환멸
  5. 5 윤 대통령 최저 지지율... 조중동도 돌아서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