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바퀴로 가는 호주 아웃백 경로시드니를 출발하여 심슨과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을 횡단하여 다시 시드니로 돌아오는 1만3000km의 여정
오창학
기간은 2009년 7~8월에 걸친 37일.
함께하는 이는 필자와 아내 외에 후배 부부가 합류해 총 4명.
여정은 시드니를 출발 -스턱턴 비치(Stockton Beach)-브리즈번(Brisbane)-프레이저 아일랜드(Fraser Island)까지 동부 해안을 끼고 북상한 후 서쪽 아웃백 지대로 들어가 찰빌(Charleville)과 버즈빌(Birdsville) 거쳐 심슨 사막(Simpson Desert)을 횡단하여 앨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 도착, 다시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쿠버 페디(Coober Pedy)로 남하한 후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Great Victoria Desert)을 횡단하여 라버튼(Laverton)-캘굴리(kalgoolie)-하이든(Hyden)을 거쳐 퍼스(Pearth)에 이른 후 퍼스에서 애들레이드(Adelaide)와 멜번(Melbourne) 캔버라(Canberra)를 거쳐 온로드로 이동하여 다시 시드니로 돌아오는 루트로 13,000Km에 달한다.
요약하면 호주 대륙의 중부지대를 동에서 서로 횡단하여 남부지대를 통해 복귀하는 계획이다. 긴장 되는 점은 700Km의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진 심슨 사막과 1350Km의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을 중간보급 없이 차 한 대로 넘어야 하는 여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두 사막이 나를 호주로 인도한 것이니 차가 한 대뿐이라 하여 우회하는 루트를 짠다면 이 길은 애초 나설 필요도 없었다.
마음 같아선 호주 서북부의 깁슨 사막과 그레이트 샌디 사막, 북부의 다윈과 그 주변의 카카두 국립공원, 케언즈와 열대우림의 케이프 요크, 걸프 사반나, 동북부 해안의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 등을 다 둘러보고 싶지만 자동차로 그 정도 여행을 하려면 최소 90일 이상(이동하고 둘러보는 데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중북부 지대와 남부의 테즈매니아 여행은 눈물을 머금고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호주, 네발로, 그리고 나드디어 시드니 공항. 까다로운 짐검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니 알싸한 한기가 가득했다. 어제까지 여름에 살다가 오늘은 겨울로 날아와 있다니… 시차는 한 시간 뿐이어서 적응이랄 것도 없지만 북반구와 정반대인 계절은 참 낯설다. 이제야 내가 두고 온 직장과 가족이 있음을 체감한다. 그래 나는 개수대의 물소용돌이마저 다르게 일고, 별자리의 이름마저 알아볼 수 없는 먼 행성에 나와 있는 것이다.
시드니 '네발로' 클럽의 회장 캡틴님이 우리 부부를 위해 마중을 나오셨다. 그립고도 반가운 얼굴. 그러나 실제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다. '네발로(
www.nebalro.com)'는 호주를 가슴에 둔 후 알게 된 시드니의 교민 오프로드 클럽이다. 근 2년 가량 얼굴도 못 본 채 인터넷상으로만 교류하였음에도 늘 일정을 함께하는 동호인 같은 친밀감이 있다.
이번 아웃백 여행의 준비에도 네발로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위성전화기, 무전기, 차량 수리를 위한 공구류, 통관이 까다로운 텐트류와 각종 야영장비, 취사도구류 등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아웃백 여행의 정보나 호주에서의 운전 정보 등 소프트웨어적인 부분까지 신세진 바가 크다. 이 여정의 계획은 내가 하였으나 실행은 네발로가 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명목상으로는 네발로 클럽의 한국지부장(자청해서 겨우 만들어낸 직함)이 장도에 오르니 클럽 차원에서 지원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서주신 것이지만 모험이, 넓은 세계를 향한 도전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의 끈끈한 교감이고 연대였을 것이다.
네발로에서 돌쇠(필자의 대화명) 환영을 위한 바비큐 모임을 준비했다 한다. 하버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가 건너 보이는 헌터스 힐 파크(Hunter's hill Park)로 향했다. 사냥꾼의 언덕이라니… 대개 '신대륙'의 지명은 이렇게 빈약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곳을 찾은 아무개의 이름을 붙이거나 두고 온 고국의 지명이나 인명을 복제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왕(King)이나 왕비(Queen)를 넣어 명명하면 그만이다. 그나마 극한의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애초에 이 땅에 자리를 잡았던 원주민들의 표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