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이 엿가락? 그만 좀 늘려라

[주장] MBC 드라마의 추락, '발편성'이 한몫했다

등록 2009.11.08 16:41수정 2009.11.0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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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눈동자> 같은 명품 드라마가 그립다. ⓒ MBC


최근 총체적으로 부진한 MBC 드라마들을 보고 있자면, 'MBC 드라마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90년대 전국 안방을 휩쓸며 MBC가 거머쥐었던 '드라마 왕국'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해진 지 이미 오래다. 이쯤 되니 차라리 옛 드라마들이 그리워질 정도다.

드라마야 말로 각자 취향에 맞게 선택하는 것이니,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MBC가 내놓았던 대작 <여명의 눈동자>(1991) 등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질지도 모른다. 일제시대와 6·25를 넘나드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위안부' 문제를 다룬 시사성, 주연인 여옥(채시라)과 대치(최재성)의 철조망 키스신 같이 드라마 속 아름다운 명장면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시청자들이라면 말이다.

어디 <여명의 눈동자>뿐이겠는가. 90년대 신세대들의 트렌드를 담았던 <별은 내가슴에>(1997)는 또 어떤가. 극이 결말로 치닫던 중, 자신의 콘서트를 찾아온 여주인공 연이(최진실)를 향해 부르던 민(안재욱)의 감동적인 노래를 들은 시청자라면, 그 짜임새와 구성에 있어 '요즘 드라마보다 훨씬 감동적이다'라는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질투>(1992), <파일럿>(1993) 등의 완성도 높은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들 드라마는 방영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시청자들 가슴 속에 아직까지 '빛'으로 남은 명작들이다. 

특히 <여명의 눈동자>는 2년여에 걸친 사전제작과 현지 로케이션 촬영도 마다하지 않는 노력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다. 방영된 지 18년이 지난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드라마계에 사전제작 시스템이 정착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이런 발상은 획기적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

'드라마 왕국' 위상 잃어버린 MBC

그런데 왜일까. 어찌된 일인지 요즘 MBC에선 이런 가슴 찡한 명품 드라마를 찾기 어렵다. 시청률 50%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한 <주몽>(2006)만 해도 그렇다. 시청률 면에서는 엄청났지만 완성도면에서는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발대본, 발편집'이라며 불릴 정도로 무성의해서 시청자들의 비판을 받았었다.

비단 <주몽>만 욕할 것은 없다. 최근 MBC 드라마는 완성도를 추구하기 보다는 시청률에 급급한 듯하다. 엉성한 시나리오로 '막장을 넘어선 막장'이란 굴욕적 평가를 받은 <밥줘>를 비롯해, 인기절정의 아이돌 가수를 투입했음에도 평균 시청률이 5%대에 머무른 <맨땅에 헤딩> 등등.


MBC 드라마가 과거의 명성을 뒤 한 채 이렇게 까지 망가진 이유는 뭘까. 그것은 드라마의 질은 고려하지 않고 인기 드라마는 엿가락처럼 최대한 늘리고, 비인기 드라마는 거침없이 싹둑 잘라버리는, 연장방송과 조기종영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청률에 편승한 장삿속이 드라마 왕국의 위상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는 MBC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방송국들도 잘 나가는 드라마는 연장, 안 나가는 드라마는 조기종영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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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 ⓒ MBC


최근 드라마 시장에서 기를 못 펴고 있는 MBC로서는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선덕여왕>이 예뻐 보일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연장+연장'은 열혈 애청자가 봐도 좀 무리수가 아닌가 싶다. <선덕여왕> 연장방송 논의를 보면 뼛속까지 우려먹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현재 <선덕여왕>은 '12회+a' 나 연장된 탓에 극 초반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든 극적 긴장감이 많이 늘어져버린 상태다. 연장 분 제작 여건도 열악하다. 제작자들은 턱없이 모자란 제작시간으로 고된 상황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남길, 이요원 등 주연 배우들은 힘든 일정 탓에 부상을 입어 촬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많은 액션 신을 소화해내야 하는 비담 역의 김남길은 부상으로 제대로 된 액션을 소화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우려 때문일까. <선덕여왕> 48, 49회에서는 비담(김날길)의 분량이 상당히 줄어들어 보였고, 몸을 움직여야 했던 연기도 어색해 보였다. 아마도 그를 사랑하는 많은 시청자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연기를 지켜봤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장 방영은 제작자나 출연진 모두에게 득이 없어 보인다. '과연 무엇을 위한 연장일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문제는 또 있다. 늘어난 확대 편성 탓에 <선덕여왕>의 '대본'도 부실해진 느낌이다. 작가는 늘어난 분량을 매우기 위해 드라마 속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집어넣고 있는 듯하지만, 이런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드라마의 흡인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잘 나가면 '연장', 안 나가면 '조기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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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저조로 조기종영한 드라마 <탐나는도다>. ⓒ MBC


<선덕여왕>의 경우 '연장'이 문제지만, 시청률이 안 나오는 드라마들은 '조기종영'이라는 쓴 맛을 맛보기도 한다. 시청자 입장에선 '연장'도 그리 달갑지 않지만, '조기종영'은 더욱 더 반갑지 않다. 최근 가장 안타까웠던 MBC 드라마는 지난여름 주말 저녁에 편성됐던 <탐나는도다>였다.

조선시대 제주를 배경으로 해녀 버진(서우)과 선비 박규(임주환), 표류한 외국인 윌리엄(황찬빈)의 삼각관계를 다룬 <탐나는도다>는 1년여 전부터 사전제작에 들어가는 등 질 높은 제작으로 '오랜만에 웰메이드 드라마가 나오나'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하지만 5%대 낮은 시청률로 인해 20부작이 16부로 줄어들며, 마니아들의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아쉬운 종영을 맞았다. 조기종영이 결정된 후 4부를 잘라내야 했던 <탐나는도다>는 후반부에 가선 초반에 못 미치는 조금 엉성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탐나는도다>를 비롯해 <2009외인구단> <맨땅에 헤딩> 등 최근 시청률 낮은 드라마들의 거듭된 조기조영은 MBC 드라마의 완성도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계속된 조기종영은 MBC 드라마의 편성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낮은 시청률로 조기종영된 MBC 수목드라마 <맨땅에 헤딩> 후속 <히어로>의 경우, 방송 일주일을 앞두고 주연 여배우가 부상 때문에 하차하는 악재가 일어났다. 하지만 전 드라마 조기종영으로 인해 촬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맨땅에 헤딩>이 예정대로 방영이 되었으면 좀 더 많은 촬영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조기종영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클 것이다.

조기종영과 연장방송은 드라마 전체 라인업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단지 시청률에 급급해 조기종영과 연장 방송을 자주 사용했던 MBC는 스스로 '드라마왕국'의 위상을 내던진 꼴이다. 가위손처럼 작품을 시청률에 따라 싹둑 잘라버리는 MBC 드라마국의 행태는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기 힘들다.

시청자도 이해할 수 없는 MBC 드라마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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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있는 아이돌 가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도 최근 5%대 저조한 시청률로 조기 종영한 <멘땅에 헤딩>. ⓒ MBC


사실 최근 MBC 드라마의 문제는 낮은 완성도와 '시청률'에 올인 하는 그런 행태에만 있지 않다. 방송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편성'에도 문제가 있다. 물론 드라마 이외 다른 프로그램들 중에도 '왜 이 시간대에 이 프로그램을 편성했을까'라는 의구심을 들게 하는 것이 적지 않지만, 우선 드라마 이야기만 해보려고 한다.

최근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편성은 <탐나는도다>와 <보석비빔밥>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탐나는도다>는 시청률 부진으로 조기종영이라는 굴레를 쓰고 브라운관에서 총총히 사라졌다. <탐나는도다>가 편성된 시각은 '주말 저녁' 8시다. 주말 저녁 8시가 어떤 때인가. 대부분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시간 아닌가. 그런 시간대에 이런 트렌디 드라마, 그것도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리는 드라마라니.

더구나 <탐나는도다>는 원작이 만화다. 만약 <탐나는도다>를 평일 미니시리즈 시간에 배치했다면, 적어도 굴욕적인 시청률로 조기종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탐나는도다> 방영 시 주변 여러 사람들이 '편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내 주변 몇몇 친구들은 어머니한테 리모컨을 빼앗겨 보고 싶었지만 못 봤다고도 했고, 몇몇은 밖에서 노느라 못 보았다고도 했다.

주말 9시40분에 편성된 <보석비빔밥>의 경우, 동일 시간에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SBS TV의 <그대웃어요>와 같은 '유쾌한 가족 이야기'의 소재기 때문에 편성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보는 일일 드라마 시간이나 주말 8시에 배정되었으면 '차별화된 소재'로 큰 인기를 끌 수 있지 않았을까.

'엄한 곳에 힘쓴다'는 말처럼, 편성상의 문제로 우수한 드라마들을 사장 시킨 것이라면 아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좀 더 쉽게, 시청자들의 기호에 맞는 드라마를 접할 수 있게, 편성을 조정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낮은 MBC 드라마의 시청률 문제를 해결하는 쉬운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드라마 왕국' 부활을 기대한다

요즘같이 시청률에 급급해 '조기종영' '연장방영'이 판을 치는 현 드라마 세태에서, 다시금 <여명의 눈동자> <파일럿> 같은 수준 높은 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그럼에도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는 '드라마 왕국'의 부흥을 간절히 꿈꾸는 이유는 명품 드라마가 주는 충격과 전율을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난 사랑하는 여인과 내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친구를 묻었다. 그들은 가고 지금 난 남았다. 내가 남아있는 이유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무정한 세월을 견디며 살수 있으니까." - <여명의 눈동자> 대사 중

<여명의 눈동자> 하림(박상원)의 마지막 대사와 같은 울림을 요즘 MBC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부디 지금부터라도 MBC 드라마의 시계가 앞으로 가기를 바란다.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선덕여왕 #파일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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