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뜨락'을 '숙지원'으로 정하다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등록 2009.11.09 09:35수정 2009.11.0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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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간 '정원' 혹은 '텃밭'으로 불렀던 '아내의 뜨락'에 이름을 붙였다. 책 몇 권 읽은 값을 하겠다고 고금의 문헌을 뒤적이고 한시의 구절, 경전의 끝자락을 살폈으나 아내와 나의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가까운 곳에서 이름을 찾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난 봄이었다. 항아리와 절구통이 어울리는 예스러움을 드러나는 이름일 것, 지형적인 특성과 우리가 지향하는 뜻을 담을 것, 편안한 정원의 이미지를 살릴 것, 그리고 '아내의 뜨락'이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가볍지 않은 이름일 것 등의 나름대로 몇 가지 기준을 정하고 고심한 끝에 정한 이름이 숙지원(淑芝園)이다.
a 숙지원의 봄 지난 봄에 잡은 서편 철쭉길. 서쪽이기에 흰색 꽃을 심었다.

숙지원의 봄 지난 봄에 잡은 서편 철쭉길. 서쪽이기에 흰색 꽃을 심었다. ⓒ 홍광석


숙지원(淑芝園)의 숙(淑)은 '맑다'는 뜻을 가진 아내 이름의 끝 글자이다. 지(芝)는 원래 '-의' 뜻을 나타내는 갈 지(之)를 넣었으나 갈 지(之)보다는 향기로운 풀이라는 뜻을 가진 지초 지(芝) 차용하였고, 원(園)은 그대로 뜨락을 나타내는 글자였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붙였다.

숙지원(淑芝園)은 마을에 있으면서도 산을 끼고 있어 청정한 솔바람이 지나는 지형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고, 그런대로 부르기 쉬우면서도 예스러움을 풍기는 듯한 이름 같아 그 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숙지원(淑芝園)은 아내 숙(淑)의 정원(庭園)이요 이는 곧 '아내의 뜨락'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라는 점에서 괜찮을 것 같았다.

a 숙지원의 여름 지난 여름 잔디를 깎을때의 장면이다.

숙지원의 여름 지난 여름 잔디를 깎을때의 장면이다. ⓒ 홍광석


인터넷을 검색하니, 한자 이름은 모르겠으나 몇 군데 지명이나 고시원 이름, 상호 등이 있어도 특별히 흔한 이름은 아니었고, 특히 청와대에 있는 예쁜 정원이름이 숙지원이라고 했던 점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내의 뜨락'이라는 의미를 담고, 그러면서 편안한 정원의 기원을 담았다는 숙지원(淑芝園)을 아내에게 설명했더니 "내세울 것도 없고, 땀이나 흘리는 텃밭에 이름이 꼭 필요한 것이냐?"고 반문하면서도 공감해주었다. 아마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했던 내 정성을 봐서 동의해준 것으로 본다.

그렇게 이름을 정하고 보니 답은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먼 길을 돌았다는 생각이 든다. 알지도 못하는 경전을 뒤적이고 옛 시구절에 얽매였던 일이 우습기도 하다. 그러면서 지금 내가 살아온 세월도 먼 곳 만을 쫓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 어렵고 힘든 세월을 말없이 지켜봐준 아내의 정원, 숙지원(淑芝園)에서 지난 세월의 절망을 다독이며 살고 싶다.


a 숙지원의 가을  동생 부부와 야콘을 캐던 날.

숙지원의 가을 동생 부부와 야콘을 캐던 날. ⓒ 홍광석


먼 곳을 헤매다 찾은 이름, 숙지원(淑芝園). 그러나 아직 숙지원에는 집이 없다. 물론 안내판도 없다. 가까운 장래에 집을 짓고 작은 화강암에 이름을 새겨 입구에 세울 계획이지만, 우선 주변 친지들에게 숙지원(淑芝園)의 유래와 뜻을 알릴 작정이다.

이제, 지난 1년의 농사는 이제 거의 마무리했다. 고추는 잘 말려 김장 준비를 위해 갈무리해두었고, 야콘과 고구마는 주변에 신세를 진 친지들과 나누고도 한 겨울 먹을거리 정도를 남겼고, 팥은 아내가 좋아하는 팥죽을 쓸 만큼 모아두었으니 동짓날에도 걱정 없을 것 같다.


어제는 마지막 가을걷이로 생강과 울금을 캤다. 생강은 옛날 나주 지역의 진상품일 정도로 맛과 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토종을 심었는데 제법 양이 많아 생강차를 좋아하는 친지들에게 조금씩 나누어도 될 것 같다.  참고로 생강은 옛날부터 약재로 쓰였고, 공자님도 매일 조금씩 드셨을 정도로 약리적 효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우수한 건강식품이라고 한다. 많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a 숙지원의 겨울 지난 1월쯤 잡은 장면이다. 숙지원 바로 옆에는 송림이 우거진 산이 있다.

숙지원의 겨울 지난 1월쯤 잡은 장면이다. 숙지원 바로 옆에는 송림이 우거진 산이 있다. ⓒ 홍광석


오늘은 오전부터  비가 내렸다. 별로 할 일이 없어도 오후에 아내와 숙지원(淑芝園)을 다녀왔다. 상추 몇 잎 뜯는 일이 고작이지만 잔디밭과 그곳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살피며 이 겨울에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재미다. 

참, 북쪽에서 온 호마는 북풍에 의지하여 고향을 보고(胡馬依北風) 남쪽 월나라에서 온 새는 나무의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越鳥巢南枝)는 시 구절이 있다. 또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 쪽에 둔다 수구초심(首丘初心)도 있다.

나이 탓인인지, 자주 고향 생각이 나는 계절이다. 그런 나에게 숙지원(淑芝園)은 갈 수 없는 고향을 향해 발돋움 하는 곳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서하라는 필명으로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서하라는 필명으로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숙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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