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들의 정치적 판단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일까? 흔히 이념, 정책, 이미지 등의 모범 답안이 그 요인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 모든 모범답안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견제와 균형에 대한 강렬한 욕구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스르려는 정치세력은 반드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미 오래전 위대한 공화주의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익을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귀족적 엘리트들에 대한 민중의 강렬한 견제 욕구를 활용하여 긴장과 균형이 살아있는 역동적 정치 시스템을 설계할 때 공화국의 위대함이 발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서구 민주공화국들의 영원한 모델인 공화국 로마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견제와 균형의 욕구가 꿈틀거리는 한국정치
지금 한국 정치지형에서 이 강렬한 견제와 균형의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다. 필자는 지난 재보궐 선거 사전 예측 단계에서 야권의 우위를 예상하기보다 중도실용주의로 재미를 본 여당의 우위를 점친 일부 전문가들의 오류는 바로 이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 정부의 일부 중도실용주의 행보의 효과가 정말 없었던 것일까? 일각에서는 설문조사를 근거로 하여 체감효과가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설문조사라는 피상적 조사 수단을 가지고 속내를 진단하는 것에 의문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면 일부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문제는 이 작은 행보를 무력화할 정도로 정부의 커다란 기조가 중도실용이라기보다는 극단적 위임론과 제왕적 스타일에 있다는 것에 있다.
극단적 위임론이란 지난 대선에서의 당선을 곧 자신들의 모든 아젠다에 대한 백지수표 위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일부 중도 실용주의로 정치자본을 축적한 것에 힘입어 4대강, 미디어법 등의 자의적 아젠다에 더 공격적으로 몰입하려 한다. 과거 근대초기에나 유행한 이러한 극단적 위임론은 강력한 견제의 힘을 아래로부터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제왕적 스타일이란 건전한 보수답게 스스로 절제하고 스스로 견제하기보다는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을 치우고자 하는 경향을 말한다. 사실 진위를 떠나서 정치가 '개념의 전투'임을 고려한다면 김제동 퇴출 사건 등의 일련의 흐름은 집권 진영에 대한 강렬한 견제심리를 발동시킨다.
현재 국면에서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키워드는 견제와 균형이다. 그리고 그 선장은 민심이다. 표면적으로는 집권진영 내 박근혜 의원의 견제와 균형 시도는 계파 전투이다. 하지만 이 현상의 뿌리에는 박근혜를 통해서 집권진영을 견제하고자 하는 민심이 뿌리내리고 있다.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의 약진, 진보정당들의 부진은 그 정당들 자체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이를 통해 집권진영을 견제하고자 하는 민심의 정치적 선택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나 진보 엘리트가 민심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이 엘리트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 민심이 그 견제의 도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 현 유동적 지형은 또 달라진다.
현재 견제와 균형의 최대 수혜자는 이명박 정부
현 견제와 균형의 지형으로부터 최대의 수혜자는 누구일까? 박근혜 대표일까 아니면 민주당일까? 사실은 바로 현 정부이다. 이는 마치 미국의 건국 시조인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판 촛불시위를 정치시스템에 활력을 준다는 의미에서 고마워한 것과 이치가 같다. 이를 이해한다면 한국의 보수주의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하지만 그간의 일련의 사태나 이번 우스꽝스러운 헌재 판결 소동 뒤에 가려진 금융회사지주법 통과로 인한 자의적 재벌 지배력의 강화는 그러한 기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미국의 경제대위기가 우리에게 가르쳤듯이 시장질서 내에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반드시 고삐 풀린 시장의 광기와 '치팅 컬쳐'(사기와 부패의 문화)가 시작된다. 아무래도 민심과 시장의 견제와 균형에 대한 욕망이 갈수록 강렬해지는 느낌이다.
-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생활정치연구소 회원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생활정치메타블로그(www.lifepolitic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11.09 12:56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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