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의 숲에서 문화예술사를 꿰뚫다

[3일간의 중국 도시기행 25] 시안(西安) 첫날 오후: 비림, 시안성곽

등록 2009.11.13 10:48수정 2009.11.1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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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박물관 비정의 현판 글자 '碑'에 점이 하나 없다. 이것은 아편전쟁의 영웅 임칙서와 관련이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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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 내 전시실에 전시된 비석들. 비림은 비석의 숲이다. ⓒ 모종혁


중국에는 각 시대의 비석을 모아놓은 숲 비림(碑林)이 여러 곳 있다. 각지의 비림 중 시안(西安) 비림박물관은 최고로 꼽힌다. 비석을 가장 일찍부터 보관했다. 유명하고 가치 높은 비석도 많은 예술창고다.

비림박물관은 원래 공자의 사당 문묘(文廟)였다. 문묘는 지명도와 규모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는데, 비림은 등급이 낮아 반원형 연못이 있다. 이에 비해 공자의 고향인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있는 문묘는 원형 연못이 있다.


비림의 역사는 이미 천년에 가깝다. 비림은 1087년 북송시대부터 당나라 비석들을 옮겨오면서 조성됐다. 비석은 당 문종이 개성석경(開成石經)을 새긴 데서 시작됐다.

문종은 경전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국자감의 감정 아래 개성석경을 제작토록 했다. 당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친히 석태효경(石台孝經)을 쓰기도 했다. 비석의 제작은 국가적인 사업이라 당나라는 비석을 국립대학인 국자감 내에 보관했다.

당대 말기 나라가 쇠락하면서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지금의 시안인 장안(長安) 절도사로 있던 한건은 거대한 장안성을 축소하면서 국자감에 있던 비석들을 성 밖 황무지에 내다버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대 사람들이 진귀한 비석 일부를 수습하여 상서(尙書)부로 옮겨 놓았다. 상서부는 위치는 좋지만, 보관 장소로는 문제가 많았다. 지세가 낮고 습기가 많아 비석이 쉽게 파손됐다. 송대 지방관 여대충은 공간이 넓은 문묘에 비석을 옮겨 지금과 같은 비림을 갖추게 됐다.

오늘날 비림박물관에는 한나라 때부터 근대에 이르는 각종 비석과 묘지명(墓地銘) 2300여개가 있다. 보관된 비석 중 1807개를 6개의 전시실과 8개의 비정(碑亭), 6개의 비랑(碑廊)에 전시하고 있다.


석각예술관에는 능원에서 출토된 석각과 종교 예술물이 있다. 비림의 총 면적은 3만1900㎥, 전시실 면적은 3000㎥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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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은 문묘의 흔적이 남아있다. 비림의 연못은 반원형의 반지이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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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종은 우렁차면서도 은은한 소리로, 중국에서 천하제일종으로 찬사 받고 있다. ⓒ 모종혁


비림박물관에 들어서면 문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공자는 유학의 창시자로, 중국 역대 왕조에게는 문선왕(文宣王)으로까지 봉해졌다. 옛 중국인들은 공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동서 두 문을 열어놓았다. 이 동문을 의로(義路), 서문을 예문(禮門)이라 했다. 남문은 폐쇄하여 새문(塞門)이라 했다.

문 안에는 반원형 연못이 두 개 있다. 중국 봉건왕조시대에는 국가에서 공묘를 조성했다. 이에 대한 규정을 두어 국가급 공묘는 연못을 원형으로 하여 벽옹(辟雍)이라 했다. 지방의 공묘 연못은 반원형으로 반지(冸池)라 불렸다.

과거에 급제한 인재들은 공묘에 와서 배알했는데, 반지에서 붓을 씻었다. 이 때문에 과거 급재자를 입반(入冸)이라 부르기도 했다. 저수지 북쪽에는 석패방인 영성문(欞星門)이 있다.

영성은 28성수 중 인재를 뽑는 일을 주관하는 신이다. 공자를 기리는 제사 때는 고급 관리만 영성문의 중문을 통과하고 중하급 관리는 서문을, 나머지는 동문으로 출입했다.

영성문 북쪽 정자에는 경운종(景云鐘)이 있다. 당나라 예종 경운 연간에 만들어져 붙여진 이름이다. 청동으로 주물했는데, 높이 2.47m, 직경 1.65m, 무게는 6톤에 달한다.

종 아래는 여섯 물결선으로 있고, 몸체는 용, 봉황, 학, 비천, 맹수 머리 등이 도안되어 있다. 종 머리는 한 마리 맹수 머리로 되어 있다. 종 안에는 292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예종이 친히 썼다. 내용은 도교 사상과 종소리에 대한 찬미이다. 경운종은 그 소리가 힘이 넘치면서 은은해, 중국에서 천하제일종으로 찬사 받고 있다.

경운종 맞은편에는 대하석마(大夏石馬)가 있다. 대하는 418년 흉노족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건립한 소수민족 왕조다. 남북조 분열 시기 장안을 공격해 점령하고 혁련발발의 아들이 혁련궤가 태수로 봉해졌다. 대하석마는 시안 외곽 차자자이(査家寨)에서 출토됐는데, 그 일대가 혁련궤의 묘지로 묘 앞에 있는 석각의 하나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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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에는 개성석경이 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경전을 베껴 쓰는 과정에 틀린 글자가 많았기에 이 비석을 교본으로 사용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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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시실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기독교의 중국 전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 모종혁


비림 중앙에는 가장 큰 비정이 있다. 이 비정은 청나라 때 건립된 것으로, 석태효경이 안치되어 있다. 석태효경은 745년 현종이 친필로 효경을 비석에 새긴 비석이다. 효경은 공자와 그의 제자인 증자가 나누었던 효에 대한 문답을 적은 경서이다. 비림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비석으로 유명하다.

비정에는 비림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데, '碑' 자에 점 하나가 없다. 현판 글자는 청나라 말기 아편을 싣고 온 영국의 배를 태워 아편전쟁을 부른 임칙서가 썼다. 당시 임칙서는 아편전쟁 이후 청이 영국으로 화친하자, 전쟁 유발자로 몰려 신강성으로 유배됐다.

유배 길에 시안에 둘러 현판 글을 남긴 임칙서는 유배지에서 풀려나오면 나머지 점 하나를 쓰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유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다.

비정 뒤 제1전시실로 발길을 돌리면 본격적으로 비의 숲이 시작된다. 제1전시실에는 개성석경이 있다. 개성석경은 당 문종 때 114개 석판에 65만2백여 자로 12경전을 새겼다.

12경전은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논어, 효경, 이아(爾雅) 등이다. 옛날 유생들의 필독서로 과거를 보기 위해 통달해야 했다. 개성석경은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유생들이 경전을 베껴 쓰는 과정에 틀린 글자가 많았기에 비석을 교본으로 사용토록 했다.

제2전시실에는 당대 저명한 서예가의 비석을 전시하고 있다. 안씨 가문의 족보를 새긴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와 왕희지가 친필로 쓴 대당삼장지효서비(大唐三藏至敎序碑)가 유명하다.

당대에는 유명 서예가의 글씨를 얻어 부모님 비석을 해 드리는 것이 큰 효행이었다. 이외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기독교의 한 일파인 경교의 중국 전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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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전시실에는 탁본을 뜰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탁본 가격은 비석의 가치에 따라 다르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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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각예술관에 전시된 자오링 육준.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있는 부조물의 진본은 해외로 유출되어 미국에 있다. ⓒ 모종혁


제3전시실에는 한나라부터 위진남북조시대의 비석과 묘지명을 모아 놓았다. 중국 서예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비석은 처음 관을 굴에 밀어 넣던 돌이었다.

진나라 이후 지금처럼 묘 앞에 세워 놓는 비석이 됐다. 전시실에서 가장 유명한 비석은 초서로 쓰인 천자문비(千字文碑)다. 초서는 당대 중엽 장안의 2대 괴물이라 불렸던 화초가 창안한 글씨체다.

제4~6전시실에는 원나라 이래 청대까지의 비석이 있다. 제4전시실에는 유명한 시문비(詩文碑)만을 모았다. 제5전시실은 주로 청나라 비석인데, 당시 사회활동을 주로 새겨 사회사 및 지방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되고 있다.

제6전시실에서는 청나라 시가와 산문(賦)이 위주로, 원·명대 서예가 작품도 일부 있다. 여기서는 탁본실이 따로 있어 현장에서 탁본을 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탁본 가격은 비석의 가치에 따라 다른데, 보통 50위안(한화 약 8500원)에서 200위안(약 3만4000원)까지 한다.

전시실 옆에는 석각예술관이 있다. 서한 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능원에서 출수집한 각종 석각과 종교 예술품 70여개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자오링(昭陵) 육준(六駿)이다. 자오링은 당 태종 이세민의 능원이다. 원래 자오링을 장식했는데, 어느 때인가 시안 내 현무문으로 옮겨졌다. 모두 높이 1.5m, 넓이 2m로, 당 태종이 전투시 타던 말을 부조한 것이다. 육준의 제자는 당시 최고의 서예가였던 구양순, 은중용 등이 썼다. 현재 비림에는 육준 중 다섯 개만 있고, 하나는 해외로 유출되어 미국에 있다.

당 고조 무덤 앞에 있던 코뿔소 석상도 있다. 이것은 베트남에서 조공으로 바쳐진 코뿔소를 보고 만들었다. 자연석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석상의 무게가 10여톤에 이른다. 오늘날 중국 묘 앞에 세워놓은 동물 석상 중에서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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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공원에서 바라 본 시안성의 남문. 성벽 앞에 수로가 있어 조교를 이용해야만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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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위 성벽에서 바라본 성곽과 환성공원의 전경. ⓒ 모종혁


비림 앞은 고성벽인 시안성곽이 있다. 시안성곽은 12m 높이로 시안 시내를 둘러싸고 있다. 성벽의 위쪽 폭은 12~14m, 아래쪽 폭은 15~18m에 달한다.

서안성곽은 1370년 명 태조 때 공사가 시작하여 1378년에 완성했다. 오늘날 중국 고대 성벽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됐고, 난징(南京)성과 더불어 중국 양대 성벽으로 꼽힌다.

성벽 건설 당시 남쪽과 서쪽은 잔존했던 수당시대의 성벽을 기초로 했다. 길이는 동벽이 2886m, 서벽이 2706m, 남벽은 4256m, 북벽은 4262m로, 총 13㎞912m에 달한다.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보수작업으로 원래의 흙 성벽에 푸른 벽돌을 쌓았고, 성루도 개조하고 배수로도 만들었다.

가장 최근에 한 보수 공사는 1983년에 있었다. 대규모 보수작업을 통해 훼손된 동문과 북문의 전루(箭樓), 남문의 갑루(閘樓), 조교(弔橋)를 복원하고 성벽 앞 환성공원(環城公園)을 조성했다.

시안성곽은 고대 중국 성벽의 특징을 집약해 보여준다. 성벽이 넓고 높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은 황토로 다진 판축(板築) 덕분이다.

이 황토는 석회·찹쌀즙·다래즙 등을 섞어서 다졌는데, 굳으면 돌보다도 더 단단했다. 성벽에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개천인 호성하(護城河)와 조교, 갑루, 전루, 각루(角樓), 적루(敵樓) 등을 두어 성을 보호했다.

성의 동서남북에는 각기 용도가 다른 문이 있다. 남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문으로, 582년에 만들어져 가장 오래 됐다. 원래는 당대 황성 남면에 있던 안상문(安上門)이었다. 당대 말 한건이 성을 축소할 때 남문으로 바뀌어졌다. 명대에는 이 문을 영령문(永寧門)이라 불렀다.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이다. 정식 명칭은 안원문(安遠門)이다. 20세기 초 신해혁명 시 혁명군이 시안을 공격할 때, 이 일대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교전으로 북문 성루는 불타버렸다. 이를 1983년 보수하여 원래의 전루를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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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성곽 위는 버스 두 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성벽 폭은 최대 14m에 달한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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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귀빈이 올 경우 남문에서는 성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다를 바 없다. ⓒ 모종혁


동문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과 생필품 등 공물들이 들어오는 문이다. 명대 처음 만들어졌는데, 본래 이름은 장락문(長樂門)이다. 명대 말 이자성이 이끈 농민군이 동문을 거쳐 시안에 들어왔다.

이자성은 성루 위에 걸려 있는 장락문 편액을 보고 주변 병사에게 "황제가 오랫동안 즐거우면 백성들은 고통스럽겠군"이라 말했다. 이에 병사들은 비분강개하여 성루를 불태워 버렸고, 청나라 때서야 다시 복원했다.

서문은 실크로드로 향해 열린 문으로, 서방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했다. 본래 당대 황성의 서쪽 중문으로, 한건이 장안성을 축소할 때 남아 있다가 명나라 때 지금의 자리로 이동했다. 정식 명칭은 안정문(安定門)이다.

성곽이 구축된 경계는 근세기까지 시안시의 도심이었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는 성벽 위에서 제등 행사를 벌이고 등불을 밝히는 축제가 열린다.

# 여행Tip

비림박물관은 시안(西安)시 난다제(南大街) 수위안먼(書院門)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비림의 개방시간은 여름철 8:00~18:45, 겨울철 8:00~18:00이다. 입장료는 45위안(약 7650원)이다.

가는 교통편은 다양하다. 버스는 시내 각지에서 출발하는 14, 23, 40, 118, 208, 213, 214, 221, 222, 232, 302, 309, 402, 512, 704, 710, 800번 등의 버스가 수위안먼이나 비림 정거장에 도착하거나 지난다. 택시를 탈 경우 시안 기차역에서 12위안(약 2000원)이면 도착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중국 #시안 #서안 #비림 #시안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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