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걸과 거북, 나를 잡아끈 젊은 작품들

[전시리뷰] 유성하&이정우 개인전

등록 2009.11.13 16:30수정 2009.11.1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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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끝에 짬이 날 때 마땅히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럴 땐 어김없이 "왜 이렇게 놀 곳도, 볼거리도 없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이 오래된 버릇은 때때로 자신을 돌아볼 기회마저 빼앗아버린다. 아마 그 기저에는 모든 것을 다 낙후된 지역문화 탓으로 둘러대고픈 의도가 깔려 있었으리라. 그러나 대체 언제까지 '중앙'과 '지역'의 격차를 운운하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조할 것인가. 이제 그만, 지겨운 신세타령은 때려치우자!

여기, 황무지와 같은 땅 위에 선 젊은 화가 두 명이 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지역을 떠나가는 동료를 한번쯤 배웅해 보았을 것이다. 아니 여러 번?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 도시에 남아 자신들이 가진 젊음과 가능성이라는 무기로 도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Part 1_ "Hello, Vogue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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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RYU 그는 ‘EDWARD RYU’라는 이국적인 예명을 가지고 있었다. ⓒ 국은정

지난 10월 29일부터 11월 5일까지 대전 중구 대흥동에 위치한 쌍리 갤러리에서는 젊은 작가 유성하씨의 여섯 번째 개인전 'EDWARD RYU's Vogue Girl Story'가 열렸다. 그는 'EDWARD RYU'라는 이국적인 예명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데, 그래서 붙여진 듯한 작가의 다른 이름은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준 그림 속 인물들의 이미지들을 무척 닮아 있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 뚜렷한 윤곽선,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구도의 작품들이 방문객을 먼저 맞았다. 지역에서 전시회를 즐겨 다녀본 사람들에게조차 다소 생소하고 파격적인 이미지로 다가왔을 작품들 속에는 하나같이 도도해 보이는 여자들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앞서서 예상했던 이미지들이 깨어지는 아찔함을 추스르고 다시 그림 속 화려한 그녀들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작품을 이해할 단서를 찾기 위해서 머릿속에 뒤엉킨 기억 조각을 찾아보다가 문득 얼마 전 비자금 사건으로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화제 속 그림,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떠올랐다. 하나 더 꼬리를 물고 떠오른 이름은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워홀'이다. 작가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 'EDWARD RYU'의 작품 역시 팝아트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우리에게 이렇게 낯선 그림 이미지들이 서양에서는 이미 1950, 60년대를 풍미했던 과거 속 사조라는 설명까지 듣고 난 후, 지역에서도 무척 보수적인 곳으로 손꼽히는 이곳 대전에서 맞닥뜨린 이번 전시는 생각할수록 더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구는 분명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두 개 공간에서는 서로 다른 각각의 개별화된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이 지구 위 사람들은 어쩌면 수많은 과거와 현재, 미래들이 복잡하게 뒤섞인 공간속을 살면서 서로에게 각자가 인식하는 다양한 시간의 화법을 가지고 대화를 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지구와 멀리 떨어진 행성에 사는 존재와도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그림들은 다소 엉뚱하고 발칙한 생각들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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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RYU'S 의 Vogue Girl Story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 뚜렷한 윤곽선,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구도의 작품들이 방문객을 먼저 맞았다. ⓒ 국은정


그동안 주로 사회 이슈나 정치 문제를 노골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많아 주변 사람들이 만류하기도 했을 정도였단다. 이번 전시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 작품들로 1930년대 경성에서 유행을 선도해나가던 '모던 걸'의 이미지를 빌려와 세련되면서도 시대의 일면을 대표하는 새로운 여성상, 일명 'Vogue Girl'을 형상화했다.

그가 바라보는 'Vogue Girl'은 극단적일 만큼 화려한 의상과 헤어, 화장을 하고 있지만, 몸 골격이나 이목구비는 오히려 남성에 더 가까웠다. '남성의 여성화'와 '여성의 남성화'를 동시에 담은 그림들은 대상을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만화적 요소와 피카소적인 구도가 어우러져 관객에게는 일종의 퍼즐놀이를 권유하는 듯하다. 그림 속 숨겨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다보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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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RYU'S 의 Vogue Girl Story 그가 바라보는 ‘Vogue Girl’은 극단적일 만큼 화려한 의상과 헤어, 화장을 하고 있지만, 몸의 골격이나 이목구비는 오히려 남성에 더 가까웠다. ⓒ 국은정


어딘가 모르게 판화 같아 보인다고 물으니 작가는 그럴까봐 아크릴 물감을 여섯 차례나 덧칠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계로 복사하듯 찍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속았지? 이건 그림이야!"라고 관람객을 희롱(?)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 이 예사롭지 않은 테크닉!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계산기를 한번쯤 두드려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건 아마 우리에게도 'Vogue Girl'의 취향이 묻어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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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RYU'S 의 Vogue Girl Story 림들은 대상을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만화적 요소와 피카소적인 구도가 어우러져 관객에게는 일종의 퍼즐놀이를 권유하고 있는 듯하다. ⓒ 국은정


'EDWARD RYU'는 기존 작업들에 비해 보다 깊어진 은유와 세련되고 강렬한 이미지로 관람객을 유혹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미 다섯 번의 전시를 마치고도 왕성한 창작열을 발산하고 있는 그에게서 '자신감'이라는 세 글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Part 2 _ 거북이 바라본 바다, 그 너머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대전 서구 괴정동에 위치한 롯데화랑에서는 이정우씨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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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개인전, <휴식을 찾아- 별비가 내리던 날>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대전 서구 괴정동에 위치한 롯데화랑에서는 이정우 씨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 국은정


첫사랑의 기억이 그렇듯 '처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특별하게 각인되는 법이다. 하물며 처음 세상에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을 내어놓는 작가의 마음속엔 얼마나 많은 생각의 파도들이 다녀갔을까. 때로는 물밑의 모래알도 다 헤일 것처럼 잔잔하던 바다는, 또 어느 날엔가 거센 풍랑에 몸살을 앓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엔 더없이 아득해지는 자신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채 끝없이 안으로만 침잠해 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거쳐 간 후에야 작가는 오래도록 응시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을 찾게 되었으리라.

어느덧 그는 자신과 아주 닮아있는 바다거북 한 마리를 캔버스 위에 조심스럽게 그려 넣고 있었다. 태고의 신비를 딱딱한 자신의 갑옷 속에 감추고 드넓은 바다를 누비던 바다거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바다 속 풍경과 마주할 때마다 낯설음을 느꼈다. 그리곤, 자신의 퇴화된 날개라고 믿는 짧은 앞다리를 휘저으며 바다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휴식을 찾아 긴 여행을 시작한다. 어느 낯선 해변에 닿은 거북은 무심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얼마나 멀리, 가족과 친구들,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 나와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엄습해오는 지독한 추위,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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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개인전 <휴식을 찾아> 어느덧 그는 자신과 아주 닮아있는 바다거북 한 마리를 캔버스 위에 조심스럽게 그려 넣고 있었다. ⓒ 국은정


그러나 바다거북은 오랜 여행에 지친 몸을 하고도, 무서울 만큼 심한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결코 절망이나 어둠, 삶에 대한 비관적 이미지를 갖기보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생명들에 대한 연민, 달콤한 꿈을 꾸고 난 아침 같은 부드러움,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희미한 짐작 등 삶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투영하고 있었다. 작은 달팽이와 마주하고 있는 바다거북의 눈길은 마치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를 기억해내고 있는 듯이 깊고 그윽하다. 둘은 어떤 대화를 주고받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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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개인전 <휴식을 찾아> 작은 달팽이와 마주하고 있는 바다거북의 눈길은 마치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를 기억해내고 있는 듯이 깊고 그윽하다. 둘은 어떤 대화를 주고받은 것일까? ⓒ 국은정


그림의 배경이 되는 부분은 가까이 가서 보아야만 세심한 붓질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림의 대상인 바다거북은 먹이 스며드는 정도를 이용하여 최대한 부드럽고 온화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오직 먹의 농담만으로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잔잔하게 표현해낸 이정우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Andre Gagnon의  'Comme au premier jour(첫날처럼)'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주 까맣지도 아주 푸르지도 않은 그 두 빛깔이 만나서 빚어내는 어스름이 깔린 새벽 바닷가, 그 끝에 홀로 앉은 한 사람은 지금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절대 고독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온몸으로 그 고독을 즐긴다.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허물어져 버릴 것 같은, 슬프고도 달콤한 앙드레 가뇽의 피아노 선율이 먼 시원을 향해 고개 든 바다거북의 표정과 오버랩 되면, 눈을 감아도 그 형상들이 다 보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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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개인전 <휴식을 찾아-추억을 보다> 먹의 농담만으로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잔잔하게 표현해낸 이정우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Andre Gagnon의 ‘Comme au premier jour(첫날처럼)’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국은정


대상이나 색채를 과장하거나 왜곡시키지 않으려는 의지가 배어나는 그림들은 분명 작가의 조용한 성품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아서 보는 이들에게 그림 속에 각자의 감상을 채워 넣을 자리를 잊지 않은 작가, 첫 번째 개인전을 마친 그는 이제 또다시 크고 작은 소용돌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큰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대상과 정면으로 부딪쳐 교감하려고 노력한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pilogue_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지금까지 두 화가가 보여준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며 "둘은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카소처럼 이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더없이 감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 구도와 색채부터 판이한 두 화가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젊음'과 '가능성'이라는 무기가 가진 그들의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을 믿는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어린왕자의 말처럼 황무지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도 바로 그것일 터. 겉보기엔 쓸모없어 버려진 척박한 땅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달리 보면 그곳은 숱한 가능성들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터전이다. 황무지가 지닌 잠재력은 그 땅의 가치를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에 의해서 싹 틔고 꽃피게 될 것이다.
#유성하 개인전 #이정우 개인전 #지역문화 #전시리뷰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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