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성대를 연 중국 유일의 여황제

[3일간의 중국 도시기행 28] 시안(西安) 셋째날 오전: 첸링, 측천무후

등록 2009.11.22 10:17수정 2009.11.2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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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산과 같은 첸링. 이 밑의 지하궁전에는 무측천, 고종의 유체와 함께 진귀한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 모종혁

거대한 산과 같은 첸링. 이 밑의 지하궁전에는 무측천, 고종의 유체와 함께 진귀한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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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에 걸쳐 길게 뻗어있는 셴다오대로. ⓒ 모종혁

무려 2㎞에 걸쳐 길게 뻗어있는 셴다오대로. ⓒ 모종혁

중국 산시(陝西)성 수도 시안(西安)에서 서북쪽으로 85㎞ 떨어진 작은 도시 첸현. 그 곳에는 드넓은 관중평야에서 점처럼 거대한 무덤 하나가 불쑥 산처럼 솟아있다.

 

자동차 주차장에 내려 2㎞에 걸쳐 길게 뻗어있는 셴다오(神道)대로를 걸어 올라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분묘. 무려 해발 1047.4m에 다다르는 당나라 최대의 황제릉인 첸링(乾陵)은 거대한 규모에서 찾는 이를 압도한다.

 

첸링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 무측천과 그의 남편 당고종이 묻혀 있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두 황제가 함께 잠들어있는 합장묘이기도 하다.

 

본래 첸링은 당대 장안의 황성을 축소하여 지었다. 초기에는 궁궐, 궁문, 묘당, 비정, 목조회랑 등 여러 건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오직 석상과 비석, 석조회랑 뿐이다.

 

첸링은 무측천의 유언에 따라 706년 완공됐다. 먼저 사망한 고종의 봉분에 측천무후의 영구가 량산(梁山)으로 운송되면서 합장묘가 된 것이다. 첸링은 멀리서 보면 산과 같지만, 실제로는 인공으로 만든 능원이다. 한 개의 높은 봉우리를 젖꼭지 모양을 한 2개의 작은 봉우리가 앞에 서서 호위하는 배치구조다.

 

입구에서 봉분 중턱까지 길게 뻗은 셴다오대로 좌우 변에는 갖가지 형태의 영물(靈物) 석상이 있다. 중간 지점부터는 동일 인물인 윙중(翁仲)의 문무신 석상 줄지어 서 있다.

 

셴다오대로 가장 윗부분 양측에는 61개의 석인상(石人像)이 있다. 이것은 고종의 장례식 때 조문 온 당나라 주변 국가나 민족의 사신이나 수장(首長)을 조각한 것이다. 첸링 초기에는 모든 석인상 등에 국명과 관직,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지금은 머리도 다 잘려나가고 글씨도 훼손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살아있는 자신의 석상이 죽은 황제의 능묘에 남아있는 것을 꺼려한 사신과 수장이 몰래 석상 머리를 잘라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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셴다오대로 좌우 변에는 각종 기마 및 영물 석상이 서 있다. ⓒ 모종혁

셴다오대로 좌우 변에는 각종 기마 및 영물 석상이 서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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셴다오대로 중간지점부터 서 있는 문무신 석상은 동일 인물인 윙중을 가리킨다. ⓒ 모종혁

셴다오대로 중간지점부터 서 있는 문무신 석상은 동일 인물인 윙중을 가리킨다. ⓒ 모종혁

오늘날 무측천은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무측천은 624년 쓰촨(四川)성 광유안(廣元)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당나라 태종의 후궁으로 발탁되어 황궁에 들어갔다.

 

태종이 죽자 당 황실의 전통에 따라 다른 후궁과 함께 비구니가 되었지만, 태자 시절부터 자신을 흠모한 고종에 의해 환속되어 총애를 받았다. 655년 무측천은 총명한 두뇌와 능수능란한 정치술로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때부터 오랫동안 병석에 누운 고종을 대신해 전권을 행사했다.

 

당시 당나라는 철저한 귀족 위주의 계급사회였지만, 무측천은 이런 사회 풍토를 무시했다. 정치와 경제를 독점했던 귀족층을 배척하고 출신을 불문해 능력이 뛰어난 신진관리를 등용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무측천은 아들인 중종,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켜 꼭두각시로 삼았다. 자신에 반대하는 황족과 귀족세력도 가차 없이 탄압하고 죽였다. 숙청 대상에는 자신이 낳은 자손들도 가리지 않았다.

 

무측천은 690년에는 성신황제(聖神皇帝)에까지 올라 당나라를 폐하고 새 왕조 주나라를 개국했다. 조정 안팎의 여러 반대가 있었지만, 적인걸·위원충 등 명신을 등용하고 지지층을 다졌다.

 

적절한 재정정책과 농경장려로 국가경제도 튼튼히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이 때 다져진 치세는 705년 무측천 사후 찬란하게 꽃 피웠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풍성한 경제기반, 중용된 신진관료들은 복원된 당나라가 현종의 '개원의 치'를 다지는 초금석이 됐다.

 

세계 대제국이었던 당을 일시 폐하고 태평성대를 연 무측천이었지만, 후대인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특히 철저한 남성중심사회였던 중국에서 여성 황제나 왕은 용납되지 않았다. 무측천은 240여명의 중국 역대 황제 중 한 명이었음에도 이를 인정한 역사가는 많지 않다.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못하고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가정이 망할 때뿐이다"(상서)는 유교적 제왕학은 무측천에게 가혹했다. 송나라 이후부터 "가혹한 관리를 임용해 잔인한 정치를 한 가장 흉악한 사람"으로 폄하되며 '무후'라고 깎여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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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링에 잠들어 있는 무측천과 고종. 무측천은 일부에서 잔혹무도한 패륜녀로 평가하고 있다. ⓒ CCTV

첸링에 잠들어 있는 무측천과 고종. 무측천은 일부에서 잔혹무도한 패륜녀로 평가하고 있다. ⓒ 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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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가 빈 채로 남겨진 것은 무측천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 모종혁

무자비가 빈 채로 남겨진 것은 무측천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 모종혁

무측천에 대한 야박할 정도로 낮은 평가는 오늘날도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무측천은 권력욕 때문에 아들딸을 죽이고 손자까지 없앤 잔혹무도한 패륜녀로 평가받고 있다. 늙어서 어린 남창(男娼)과 음란한 생활을 즐기고 각종 해괴한 건강 및 피부 보양법을 사용한 탕녀로 인식되고 있다.

 

무측천이 권력욕이 강한 야심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숙청하고 죽였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절차를 하나하나 밟아 황제에 등극했다. 황제가 될 만한 능력과 비전을 갖추었고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했다.

 

대담하고 치밀한 정책으로 중국을 호령하여 역대 어느 황제보다 더 나은 성취를 이뤘다. 근 50년의 무측천 통치기간동안 농민봉기는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됐고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관료가 되었다.

 

자오원룬(趙文潤) 산시사범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이런 그릇된 인식을 뒤엎고 무측천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내렸다. 1993년 자오 교수는 중국 정사인 <구당서> <후당서> <자치통감> 등을 철저히 고증, 분석하여 <무측천 평전>(한국에서는 2004년 발간)을 발간했다.

 

<무측천 평전>에 따르면, 무측천은 선진적인 남녀평등주의자의 면모를 지녔다. 모친상에도 3년간 상복을 입게 하고 여성을 광대로 희롱 못하도록 했다. 황제 즉위 후에는 자식들의 성을 무씨로 바꾸게 할 정도로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고 봉건적인 사회 관념에 도전했다.

 

무엇보다 무측천은 거침없는 개혁군주였다.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치밀하고 대담하게 반대파를 제압했다. 관료와 민중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여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무측천 통치기의 당나라는 한나라 이후 중국 역사상 제2기의 황금시대를 구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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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개 석인상은 흥미롭게도 모두 머리가 잘려나가고 없다. ⓒ 모종혁

61개 석인상은 흥미롭게도 모두 머리가 잘려나가고 없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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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 표지석 앞 사자상은 본래 2개였는데, 지금은 단 하나만 원상태로 남아 있다. ⓒ 모종혁

능원 표지석 앞 사자상은 본래 2개였는데, 지금은 단 하나만 원상태로 남아 있다. ⓒ 모종혁

61개 석인상 앞에 서 있는 '무자비'(無字碑)는 역사적 평가를 자유롭게 하려는 무측천의 뜻이 담겨져 있다.

 

무자비는 무측천에 대한 공덕비인데, 다른 비속과 달리 아무 것도 적히지 않았다. 무측천이 죽기 직전 자신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다. 무측천이 무자비를 남긴 이유로는 세 가지 설이 내려오고 있다.

 

첫째는 무측천 스스로가 자신의 공로가 너무 커서 비석에 다 적을 수 없으므로 비워두라고 했다는 설이다. 둘째는 죽은 뒤 자신에 대한 평가를 후대인이 알아서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무측천 사후 황제에 자리에 오른 중종이 자신을 죽을 고비에 빠뜨렸던 어머니에 대한 복수로 공덕비 내용을 비워두게 했다는 주장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공덕비에 빈 채로 남겨진 것은 무엇보다 무측천의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무자비는 금나라 이후 누군가 글자를 새겨 넣어 지금은 '유자비'가 됐다. 1135년 새겨진 낭군행기(朗君行記)는 여진문자로 적혀 있어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역사적 평가가 극과 극인 군주지만, 첸링을 통해 후대인은 무측천 통치시기에 당나라의 국력이 얼마나 번성했는가를 알 수 있다.

 

1990년대 첸링 지하에 거대한 궁전이 남겨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하궁전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매장되어 있는데, 그 가치는 대략 800억 위안(한화 약 13조6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수량으로는 500t에 달하는 막대한 유물로, 이는 당시 국가 재화의 3분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중국 역대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첸링에는 고종과 무측천이 평생 동안 모은 국보급 문화재와 금은보화가 매장되어 있다. 고종이 소중히 간직했던 서예대가 왕희지의 '란정서'(蘭亭序)를 비롯해 오늘날 멸절된 무수한 서화가 묻혀있다. 란정서는 현재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채 모조품만 1만300여 종에 달하는 명품 중의 명품이다.

 

지하궁전이 량산을 파서 그 중앙에 조성해서 지금까지 도굴이 불가능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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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링박물관에는 첸링 일대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 모종혁

첸링박물관에는 첸링 일대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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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도자기의 정수인 당삼채로 만들어진 말. ⓒ 모종혁

당대 도자기의 정수인 당삼채로 만들어진 말. ⓒ 모종혁

현재 첸링의 지하궁전을 발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1958년 시안과 란저우(蘭州) 구간의 도로공사 발파작업을 하면서 농민들이 지하궁전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에 1960년 산시성 문화국은 발굴계획을 수립하여 첸링에 들어가려 했다.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우리 시대에 좋은 일을 모두 완성할 수 없다"며 발굴 시도를 무산시켰다.

 

1973년에는 역사학자이자 문학가로 무측천을 재평가한 소설을 썼던 궈모뤄(郭沫若)가 다시 첸링의 발굴을 건의했다. 하지만 저우 총리는 발굴기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향후 10년 동안 첸링을 열어선 안 된다"고 반대했다.

 

당분간 첸링 발굴을 반대하는 중국정부의 의지는 확고하지만, 산시성 정부와 학계는 발굴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산시성 고고학연구소는 첸링의 동·북·서문의 이음역학을 통해서 지하궁전의 구조와 규모를 밝혀낸 상태다.

 

스싱방(石興邦) 산시성 고고연구소장은 당장 첸링을 발굴할 것은 촉구하고 있다. 스 소장은 "첸링이 자리 잡은 량산은 카스트 지형으로 지표수가 쉽게 스며들어 지하궁전 환경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 소장은 1987년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당황실의 보물들이 쏟아져 나온 파먼쓰(法文寺) 지하궁의 발굴을 주도했다. 그는 "지하 속 문물을 계속 놔두면 훼손당한다"며 "파먼쓰 발굴시에도 지하궁 내부의 서적과 문서는 모두 썩었고 비단도 원형이 훼손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주류 역사학계는 "첸링의 지하기반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지표수가 들어간 흔적도 없다"며 "철저한 발굴과 문물 보존을 위한 기술문제가 해결됐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반박하고 있다.

 

첸링의 문화재와 유물이 세상에 드러나면 중국 역사와 세계 고고학사는 다시 써져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발굴 과정에서의 훼손과 발굴 후 유물의 완벽한 보존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첸링을 발굴하는 것은 역사의 파괴 행위다. 첸링은 중국만의 유적이 아닌 인류 전체와 후손들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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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에 의해 사사당한 중종의 딸 영태공주의 능묘로 들어가는 지하 통로. ⓒ 모종혁

무측천에 의해 사사당한 중종의 딸 영태공주의 능묘로 들어가는 지하 통로.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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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태공주묘의 궁녀도는 당황실 궁정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벽화다. ⓒ 모종혁

영태공주묘의 궁녀도는 당황실 궁정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벽화다. ⓒ 모종혁

 

# 여행Tip 1

 

첸링은 산시성 첸현(乾縣) 현청에서 북쪽으로 6㎞에 떨어진 량산에 자리 잡고 있다. 첸링의 개방시간은 매일 8:00~18:00이고, 입장료는 46위안(약 7820원)이다.

 

첸링을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안기차역 동쪽 광장에서 출발하는 파먼쓰와 첸링 전용 여행버스(旅遊專線) 2번을 타면 된다. 표값은 17위안(약 2890원)으로, 아침 8:00부터 낮 12:00까지 출발하고 파먼쓰를 거쳐 시안으로 되돌아온다.

 

# 여행Tip 2

 

첸링 주변에는 배장묘(陪葬墓)로 영태(永泰)공주묘와 장회(章懷)태자묘, 의덕(懿德)태자묘 등이 있다. 중종의 자녀인 의덕태자와 영태공주는 무측천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賜死)됐다.

 

영태공주묘는 도굴을 당하여 발굴된 유물은 당삼채(唐三彩)로 만든 시종들과 도기 만 발견됐다. 그러나 봉분 내벽에 그려진 궁녀도는 당시 당황실의 궁정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벽화이다.

 

장회태자는 무측천의 둘째 아들인 이현인데, 그 또한 무측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봉분 내벽에는 신라의 사신이 그려져 있는 외국사절도가 있었는데, 지금은 색깔이 바래고 지워져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영태공주묘는 첸링박물관 내에 있고, 입장료는 25위안(약 4250원)이다. 장회태자묘 입장료도 25위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2009.11.22 10:17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중국 #시안 #서안 #측천무후 #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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