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대결의 끝-영화 '색계'

찬바람 불때 다시보는 영화 (2)

등록 2009.11.22 18:06수정 2009.11.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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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시작될 즈음, 이유 없이 마음이 울적해 질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감성적인 영화에 빠져서 서사(敍事)가 가진 무한한 카타르시스에 마음을 맡기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초겨울에 어울리는 잔잔한 멜로 영화 하나를 소개하니, 지친 마음은 접어두고 영화의 세계에 빠져 며칠간을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색,계(色, 戒)Lust, Caution】
2007년/이안 감독/양조위, 탕웨이 주연
제 64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영화의 가치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을 연출해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중국 출신 이안 감독의 영화 '색,계'는 스파이가 되어야만 했던 한 여인의 운명과 그녀의 표적이 된 남자의 슬픈 사랑을 다룬 에로틱 멜로로서, 이안 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깊이 있는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더불어서 한국에서 개봉 될 당시, '완전 무삭제'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떠들썩하게 광고를 하여 소위'야한 영화'라는 선입견을 먼저 달게 된 영화라는 특징도 있다. 하지만 탄탄한 스토리와 개성적인 캐릭터, 세밀한 내면 묘사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걸작이며,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 소설가 장 아이링(張愛玲)의 원작을 넘어서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 할 수 없다.

▲영화 속으로

40년대 홍콩은 3년간의 일본 식민지를 겪던 시절이 있었다. 서민들은 돈이 없어서 물자를 배급 받고 부자와 귀족은 그들의 범위 안에서 결핍을 겪고 있었으나 화려했던 중국의 한 시절을 포기하지는 않고 있었다. 이 무렵 순진한 시골처녀 왕치아즈(탕웨이扮)가 대학에서 우연히 연극부에 가입하고, 그 부원들이 구국 운동이란 미명 하에 무대에 올리는 연극에 동참하게 된다. 자신을 버리고 재혼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흔들리는 나라 정세,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아서 마음 붙일 곳 없던 불안감은 연극을 하는 순간만은 잊을 수 있었기에 그녀는 이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결국 치아즈는 여름 방학 동안의 요인 암살이라는 조금 어설픈 계획에 투입되어, '현실에서의 연극'이라는 무서운 음모에 서서히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는 매국노였던 정치인 이 대장(양조위扮)을 암살하는 것이 주 계획이었고, 왕 치아즈는 막婦人이란 가상의 인물로 설정되어서 홍콩으로 피난 온 이 대장의 부인에게 먼저 환심을 얻어서 그의 집에 진입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리고 결국은 그를 죽이는 것이 최종 목표!


아무도 믿지 않고 사는 남자, 극장은 어두워서 위험하다고 여기기에 절대 가지 않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사는 사람이 젊은 미인에게 운명처럼 이끌리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왕치아즈는 양복을 맞추는 것을 살펴봐 준다는 핑계로 다가선다. 그리고 서로가 인간적인 묘한 설렘이 일 즈음 작별도 고하지 못한 채 남자는 업무를 이유로 가족과 함께 홍콩을 떠나가 버린다.

그리고 3년 뒤, 왕치아즈는 가난과 빈곤에 허덕이면서도 대학에 다니며, 암담한 현실을 잊기 위해 때때로 연극을 보거나, 허망하게 무너지는 나라에 대한 불확신을 품으며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간 이모 집에 얹혀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미 전문 독립단원으로 변신한 예전 연극부 대표가 다가와 자신들의 계획에 참여해 줄 것을 다시 부탁한다. 그러자 왕치아즈는 연극부에 처음 가입할 때처럼 큰 동요 없이 또 다시 이들의 세계에 휘말리게 된다.

3년 전 헤어졌던 남자는 이제 더욱 승승장구하여 장관이 되어있었고, 왕 치아즈는 그를 암살하기 위해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재회하게 된다. 동포를 죽이고 고문하며, 자신 외의 누구조차 믿지 못하며 암울하게 살아가고 있던 남자는 돌아온 왕치아즈에게 반가움과 조심스런 감정으로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의 진심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여자는 암살할 기회가 여러 번 왔음에도, 마음을 열지 않고 경계하는 그의 냉정한 이성 때문에 놓치고 만다. 불교에서 인간의 감성을 의미하는 색(色)과 냉철한 이성을 의미하는 계(戒)의 대결을 관객에게 암시하고, 이 과정을 그로테스크하고 오싹한 기분이 드는 정사 장면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는 감독의 변을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침내! 남자는 이 무시무시한 색과 계의 대결을 통해서 마음을 열고, 전쟁으로 피폐해져 가던 심신 앞에서 조용히 읊조리는 여자의 노래에 인간적인 평온함으로 눈물 짓게 된다.그리고 그 증표로 더없이 아름다운 6캐럿의 다이아 반지를 선물하며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말로서  그의 암살을 계획하던 한 여자를 인간적인 번민에 이르게 한다. 그러자 나라도 부모도 친구들도 어느 하나 자신을 지켜주지 못해서 떠돌게 만든 영혼에 그말은 '이 사내를 살려야 한다'는 긴박함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적을 사랑하게 된 여자가 그를 살려준 결과는 어두운 채석장 절벽 아래로 내던져지는 것뿐이었다.

결국 색과 계의 싸움은 '계'의 승리로 끝난 듯 보이지만, 그 승리의 결과는 더욱 참담하기만 하다. 살아남은 자는 평생을 후회와 죄책감으로 살아가게 되어 그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

▲매력적인 실화가 가슴 아픈 소설로, 영화로

익히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의 모델은 정핑루 라는 실제 인물이고, 그녀는 상하이 푸단 대학 교수로 있던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었다. 이런 정핑루가 암살하려 했던 사람은 딩모춘이란 사람으로서 그녀의 중학교 시절 교장이었으며 후에 국민당 간부가 된 정치인이다.

이런 '정핑루의 딩모춘 암살기도'는 실제 있었던 사건이었는데, 원작자인 장 아이링이 남편이 들려준 이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로 만든 것이 바로 '색계'이다. 실제 사건에서는 딩모춘이 정핑루의 인물이 아까워서 살려주었으나 그의 아내가 질투를 하여 총살되었다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자신을 살려준 왕치아즈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 장관이 눈물지으며 사랑과 회한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여운을 남긴다.

▲반지에 얽힌 일화

영화속에서는 두 인물의 색과 계의 대결이 색으로 승부가 날 듯이 보이는 장면에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중요한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받는 보석상 장면이 영화의 반전을 이루는 중요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하나의 감성으로 동화되었던 두 사람이 또 다시 감성과 이성, 즉 색과 계로 줄다리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곳으로 설정되어지는 곳이 바로 보석상이었다.

반면, 실제 일어난 사건에서는 정핑루가 딩모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피코트를 사달라고 졸라서 두 사람이 러시아 모피 상점에 들렀다가 사건이 발생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더구나 영화처럼 극적으로 여자가 남자의 진실된 사랑을 깨닫고 긴박하게 '빨리 도망가요!'를 외치는 상황이 아니라,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딩모춘이 서둘러 돈을 주며 혼자 골라서 입고 오라며 뒷문으로 도망 나가고, 차에 타자마자 몇 발의 총알이 차를 스친 사건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실화와 관계없이 영화는 이안 감독 감독 특유의 섬세함을 반영하여, 두 사람의 믿음과 사랑의 증표인 '핑크 다이아 반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스토리의 애절함을 더한다.또한 유달리 반짝이던 반지가 진짜인지에 대한  의문도 더불어서 증가하기도 했다. 평소 작업 스타일상 '진짜 같은 가짜'는 절대 쓰지 않는 이안 감독의 성격으로 보아, 진짜 6캐럿 다이아일 것이라는 의견이 스태프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한다.

▲불행했던 인생, 원작자 장 아이링

영화 '색계'의 원작자 장아이링(張愛玲)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관료인 아버지와 양무운동을 이끈 이홍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성장기는 불행했다. 술과 마작에 의지하느라 집안을 돌보지 않고, 급기야 정치인 자리에서도 퇴출당한 아버지와 싸운 어머니는 어린 자녀를 팽개친 채 영국으로 유학을 가버리고, 장 아이링은 고모에게 마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니의 빈자리에 들어 온 계모와의 갈등으로 아버지와도 사이가 나빠져서 집에 감금되는 등의 아픈 가정사가 그녀 소설 곳곳에 배어있다.

이런 성장기의 아픔이나 후란청이라는 유부남과의 사랑, 시대적인 이유로 겪어야 했던 슬픔 등은 그녀 작품과 인생을 통해 또다른 스토리로 남아있기도 하다.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1994), <반생련(半生緣)>(1997) 등 영화화 된 많은 작품을 통해서 그녀의 사상과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작품 '색계'는 남성과 여성의 교차된 시선을 문학과 영화에서 색다르게 느껴볼 수 있다. 원작자 장아이링이 '시대에 희생되는 여성의 사랑'을 그렸다면 이안 감독은 '사랑을 지키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남성의 뒷모습'에도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열 몇 장 밖에 안 되는 단편 하나가 아름다운 서사시로 그려진 이 영화는 차가운 계절을 더욱 시리게, 혹은 그 시리고 아픈 마음 한편에 자리한 감성의 불을 밝혀서 오랫동안 마음을 데워줄 것이다.   
#색계 #장아이링 #양조위 #탕웨이 #이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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