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87) 미팅

[우리 말에 마음쓰기 806] '만남-모임-어울림'과 '틀-얼개'를 밀어내는 한 마디

등록 2009.11.26 14:28수정 2009.11.2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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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포맷(format)

 

.. 일본의 모범을 따라 거대 만화 전문 출판사들이 탄생했고, 주간 만화 잡지, 격주간 만화 잡지라는 새로운 포맷이 등장했고 ..  《박인하-꺼벙이로 웃다, 순악질 여사로 살다》(하늘아래,2002) 148쪽

 

 "일본의 모범(模範)을 따라"는 "일본을 따라"나 "일본이 걷던 길을 따라"로 손봅니다. '거대(巨大)'는 '큰'으로 다듬고, '탄생(誕生)했고'는 '태어났고'나 '나왔고'로 다듬으며, '등장(登場)했고'는 '나타났고'로 다듬습니다.

 

 ┌ 포맷(format)

 │  (1) 일정한 모양이나 형식. '구성', '서식', '양식', '체제'로 순화

 │  (2) [컴] 데이터를 기억하거나 인쇄하기 위하여 설정하는 일정한 형식

 │

 ├ 새로운 포맷이 등장했고

 │→ 새로운 형식이 나왔고

 │→ 새로운 틀이 나왔고

 │→ 새로운 짜임새가 나타났고

 └ …

 

 '모양'이나 '형식'을 가리킨다고 하는 미국말 '포맷'이군요. 그러면 이 말뜻 그대로 '모양'이나 '형식'이라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태여 '포맷' 같은 미국말을 끌여들여서 이야기를 해야 하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낱말책을 살펴보면 '구성-서식-양식-체제'로 고쳐쓰라고 나오는데, 이러한 한자말이 아니더라도 '짜임새-얼거리-틀거리-얼개-틀' 같은 토박이말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낱말책이라 한다면 '포맷' 같은 영어는 싣지 말아야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국어학자들이 낱말책에 '포맷' 같은 낱말을 버젓이 싣는 한편, 우리 글쟁이들이 문학을 이야기한다면서 '포맷'이라는 말을 쓰는데다가, 인터넷이나 컴퓨터를 다루는 자리에서도 으레 이런 '포맷'을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꾸자꾸 쓰임새를 넓히지 않느냐 싶습니다.

 

 

ㄴ. 미팅(meeting)

 

..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며 자신의 어떤 일보다도 지도하는 학생과의 미팅을 우선하여 시간을 할애했고 ..  《박원순과 52명-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2009) 52쪽

 

 '항상(恒常)'은 '늘'이나 '언제나'로 다듬고, '대(對)하며'는 '마주하며'나 '맞이하며'로 다듬습니다. '자신(自身)의'는 '당신이 하는'이나 '당신한테 주어진'으로 손질하고, '지도(指導)하는'은 '가르치는'으로 손질하며, '우선(于先)하여'는 '앞서'로 손질해 줍니다. '할애(割愛)했고'는 '썼고'나 '들였고'로 손봅니다.

 

 ┌ 미팅(meeting) : 주로 학생들이 사용하는 말로, 남녀 학생들이 사교를 목적

 │   으로 집단으로 가지는 모임. '모꼬지', '모임01'으로 순화

 │   - 첫 미팅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 미팅이니 야유회니 하는 것들이

 │

 ├ 지도하는 학생과의 미팅을 우선하여

 │→ 가르치는 학생과 만나는 일을 앞에 놓아

 │→ 가르치는 학생하고 이야기 나누기를 크게 보며

 └ …

 

 텔레비전 수신료가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텔레비전 없이 살아온 지 열 몇 해가 되는 저로서는 전기삯을 낼 때에 수신료를 낸 일이 없어 오르거니 말거니 여깁니다. 다만, 요즈음은 '수신료'라는 말을 들으면 다른 생각이 듭니다. 왜 '수신료'라는 이름일까 하고.

 

 낱말책을 뒤적이면 '수신료'라는 낱말은 안 실립니다. 음, 저는 낱말을 찾아보기에 낱말책이라 하는데, 우리들은 으레 '국어사전(또는 사전)'이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수신료'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면 '수신(受信)'을 찾고 '료(料)'를 따로 찾아야 합니다.

 

 이럭저럭 두 낱말을 찾아보니 '수신'은 "전신이나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 따위의 신호를 받음"을 뜻한답니다. '료'는 "'요금'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텔레비전 방송 신호를 받는 요금"이 '수신료'인 셈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料'를 뒷가지(접미사)로 다루었으니 붙여서 '수신료'로 적어야 올바르다 하겠으나, 국어사전에 안 실리는 '수신료'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맞춤법에서는 '수신료'처럼 띄어서 적어야 올바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맞춤법 '큰 잣대'는 '국어사전에 안 실리는 낱말은 다 띄어서 적도록' 되어 있거든요.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지만, 텔레비전 보는 값을 올린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예전에 이웃집에 놀러갔다가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오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마디에 섞여 있던 '미팅'이라는 낱말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회사원인 사람들 여럿이 종이잔에 커피를 받아서 마시며 웃고 떠들면서 "미팅 해야지?" 하고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 사람들이 말하는 '미팅'이란 '회의(會議)'를 가리켰습니다.

 

 꽤 예전 일이었는데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오는 회사원이 뇌까리는 '미팅'이라는 낱말은 참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교 마친 회사원 동무와 선후배'를 만난 자리에서 이네들이 주고받는 말마디에도 '미팅'이라는 낱말이 섞여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한테 영어 '미팅'은 오로지 "남녀가 서로 사귀고 싶어서 얼굴을 보는 자리"일 뿐이었거든요.

 

 나중에 영어사전을 뒤적인 다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영어사전에서는 'meeting'을 "모임, 집합, 회의 대회"로 풀이를 하고, 예배나 집회나 회합이나 회담이나 토의 모두 '미팅'으로 가리키거든요.

 

 ┌ 가르치는 학생과 만나는 데에 시간을 썼고

 ├ 가르치는 학생과 어울리는 시간을 좋아했고

 ├ 가르치는 학생한테 먼저 시간을 썼고

 └ …

 

 영어가 미친바람이 아닌 돈바람으로 불 뿐 아니라 아예 뿌리내리기까지 한 오늘날 우리 삶터를 돌아보면, '미팅' 같은 낱말 하나는 아무것 아니지 싶습니다. 훨씬 골아프고 골때리고 골나간 말마디가 잔뜩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우리 말로 가리키지 못하는 삶입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터전을 우리 글로 나타내지 못하는 얼거리입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 말글을 우리 넋과 얼을 담아서 가르치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사회 안팎에서 우리 이웃들한테 우리 말글을 우리 마음과 뜻을 실어서 나누는 지식인은 얼마나 있을까요. 좌파 지식인이든 우파 지식인이든 말을 말다이 깨달으며 사랑과 믿음 배어 있는 이야기를 펼치는 지식인은 몇 사람쯤 꼽을 수 있을까요.

 

 만나니까 '만남'입니다. 모이니까 '모임'입니다. 어울리니까 '어울림'입니다. 우리한테는 '만남-모임-어울림'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맞이하는 우리들 가운데 '만남-모임-어울림'을 살피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그예 미팅입니다. 그저 미팅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만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우리 글한테 고개를 돌립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말을 손사래치고 우리 몸으로 우리 글을 몸부림치듯 내팽개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1.26 14:28ⓒ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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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외국어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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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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