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등 각종 카드들
연합뉴스
무엇보다 놀부의 일상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비결은 바로 신용카드. 카드가 아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젊은 나이에 산악자전거를 타 보기도 어려웠을 거고, 최고급 사양의 디지털 카메라로 취미활동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우연히 백화점을 갔다가 온 가족 입이 떡벌어지게 만든 멋진 텐트와 캠핑장비를 보고 즉시 구매하지 않았더라면 가족 모두와 멋진 캠핑을 다닐 기회가 언제나 가능할까. 무엇보다 지난 번 우연히 학교 후배들을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 멋지게 한턱 쏘고 다음 달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건재한 자신의 체면을 유지시켜준 카드가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돈이 없어도 일단 뭐든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공짜가 아니므로 뒷감당을 해야 한다지만 뭐 어차피 하고 싶은 거 먼저 하고 무이자로 나중에 갚으면 되니까 편리하다. 돈을 내야 물건이든 서비스든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본래의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신용거래가 등장하면서 돈을 먼저 내지 않아도 물건과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고 그 후에 약속된 대로 돈을 지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대표적인 신용거래는 전기세, 수도세와 같은 공과금, 그리고 통신료 등을 들 수 있다. 이용한만큼의 과금을 하기 위함인데 이런 거래가 가능한 것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이 서비스를 제공받는 개개인보다 훨씬 우월한 신용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한 쪽이 우월하지 않고 서로 대등한 입장에 있다면? 서로 잘 아는 사이라면 이자도 안 받고 빌려줘도 될 사람인지, 아무리 이자를 많이 준대도 절대 빌려주기 싫은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서로 잘 모르는 사람끼리의 신용거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쌍방간의 거래에 뭔가 중립적이고 공신력있는 제 3자가 개입되어 지급 보증을 해줘야 할 것이다.
그 제 3자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기 위해 신용카드가 태어난 것이다. 꼭 필요한 영역에 대해 신용거래는 인간의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과연 신용카드는 그렇게 수동적이기만 할까?
욕망을 필요로 둔갑시키는 마케팅신용카드의 혁명은 신용카드 천국인 미국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포드주의(Fordism)로 대변되는 대량생산체제는 제한된 노동 시간 내에서 최대한의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해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도입하여 노동 강도를 강화시켰고 노동 과정에서의 여가 시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데 성공하였다.
빡빡한 노동 일정과 혹독한 노동 강도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막기 위해 개별 자본의 수준에서는 상대적 고임금을 제공하고 사회적 총자본의 수준에서는 소비 양식의 재구성을 통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결합시키기에 이른다.
바로 그들의 향상된 구매력과 소비 양식의 재구성이 핵심이다. 각종 기술의 혁신이 반영된 대량 생산 체제를 통해 양산되는 각종 가전제품들은 가정의 일상 생활 속 혁신을 몰고 왔다. 새로운 필요는 수요의 폭발을 불러오고 너도나도 대량생산되는 물건들을 가정으로 수용해내기 바빴다.
각 가정에 모두 냉장고, 세탁기, TV가 보급되어 편리함이 각종 미덕으로 예찬되기 시작될 즈음 대량생산체계는 곧바로 근본적인 고민에 돌입한다. 빠른 속도로 공급은 수요를 충족해내고 곧 소비력의 한계에 이르게 된 것.
이제 마구 찍어낸 물건의 재고가 쌓이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불황의 늪에 빠지게 된다. 대량생산된 물건들이 팔리지 않으면서 기업은 구조조정을 시작하게 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더 이상 수요의 주체로서의 역량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각종 부양산업을 통해 일자리 창출을 일으켜 그들의 수요력을 만들어주려 하지만 이미 그들은 '필요한 것'은 다 구매한 상태다.
필요하지 않아도 더 구매하게 만드는 법, 그것이 바로 마케팅이다. 얼음 나오는 냉장고, 양문형 냉장고 등은 어느 순간 필요한 것으로 둔갑하여 기존 냉장고를 대체하도록 한다. 욕망을 필요로 둔갑시키는 마케팅은 지금 여력이 없더라도 일단 누리는 삶이 가능하도록 하는 신용카드에 의해 가수요를 창출한다.
"이상하다, 또 마이너스네"마케팅 홍수의 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이를 쉽게 필요로 전환시키는 마케팅 도사들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나는 완전 무방비 상태로 그저 쇼핑카트를 밀고 쇼핑몰에 들어설 뿐이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나 예전부터 필요하다고 느꼈던 물건들이 눈에 쉽게 띄는 것도 명민하신 마케터들의 고도의 디스플레이 요령임을 알 턱이 없다.
아이들의 아토피에 참숯이 좋다며 쇼핑몰 진입로에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참숯을 보노라니 갑자기 밤마다 이곳저곳이 가려워 긁는 둘째 아이가 생각나 무의식적으로 카트 안으로 밀어 넣게 된다. 물론 쇼핑해야 할 품목 리스트에 참숯이 들어있었을 리 만무하다.
장마철에 습기와 곰팡이를 제거하는 게 필요하다는 물품광고를 보니 '아, 저런 게 있었구나, 참 좋다~ 안 그래도 요즘 집안이 눅눅해져서 고민이었는데' 하며 또다시 쇼핑목록에는 없었던 제습제를 카트 안에 넣게 된다. 쇼핑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필요'를 교육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혼신을 다해 상품을 팔아야 하는 마케터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천재적인 마케터라도 내 지갑 안에 5000원만 들어 있다면 모조리 빼내봐야 5000원인 셈이다. 그러나 내 지갑 안에 신용카드가 한 장이라도 꽂혀 있다면?
천재적 마케터와 내 손안의 구매력과의 만남. 이제 나의 판단력은 중요치 않거나 어쩌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마케터는 내 지갑 속 신용카드와 대화를 나누고는 구매를 결정지어버리고 나는 그저 신용카드 발급자로서의 의미, 그리고 추후 결제일을 책임져야할 주체일 뿐이다. 고도의 마케팅 시대, 소비의 주체는 신용카드다.
'이상하다, 이번에도 또 마이너스네' 한숨을 내쉬며 가계부를 집어던지게 되는 심경은 두 갈래로 나뉜다. 나는 아낀다고 노력하는데 왜 항상 마이너스가 나는지 영문을 모르겠거나,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소비 하나하나 맘 편히도 못하는 건 우리 집 버는 돈이 너무 적기 때문이란 생각.
절대로 우리가 음으로 양으로 교묘하게 소비당하고 있어서 힘들게 버는 돈이 줄줄 새나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꾸만 나의 과소비를 탓하거나 남편의 쥐꼬리만한 월급을 탓하게 된다.
통제불가능한 신용카드, 그냥 없애라무엇이든 일단 가능하게 해주는 신용카드는 편리하다. 다만 위험할 뿐. 우리는 단 한 번도 불필요한 물건을 과소비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신용카드 결제액을 메꾸는 데 급급한 삶을 살고 있다. 평소에 잘 참고 살아도 1년에 한 두 번 사고를 칠 때면 어김없이 신용카드를 통해서다. 지름신은 신용카드와 함께 강림하신다. 아직도 신용카드는 활용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편리함을 추구하며 여기에 생각보다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산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려면 편리함을 선택하는 대신 불편함을 선택하면 된다. 통제불가능한 것을 안고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그냥 없애라.
당신이 지갑 한도를 낮춰라. 지금 당장 적정 생활비의 예산을 세우고 주단위로 현금으로 찾아서 쓰기를 실행해보라. 만약 한 달 생활비로 40만원을 책정했다면 매주 10만원씩 빼놓고 현금으로 장보기를 하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살림이 통제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의 대학등록금을 모으고 싶고 걱정되는 노후를 위해 연금이라도 하나 준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빼라. 항상 지금을 누리게 하고 미래를 '갚는 삶'의 연속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덧붙이는 글 | 에듀머니 [가정경제119] 캠페인 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에듀머니 블로그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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