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빙자간음죄 위헌... 합헌 7년 만에 뒤집어

과잉금지원칙 위반해 남성 사생활 자유 침해... 여성에겐 가부장적 성 이데올로기 강요

등록 2009.11.26 17:46수정 2009.11.2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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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빙자간음'을 처벌토록 규정한 형법 제304조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2002년 재판관 7(합헌) 대 2(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이 내려진 것을 7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26일 혼인빙자간음죄로 형사처벌을 받은 임아무개씨 등 2명의 남성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남성의 성적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재판관 6(위헌) 대 3(합헌)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형법 제304조(혼인빙자간음)는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날 위헌 판결로 이 조항은 1953년 제정 이래 5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여성에 가부장적 성 이데올로기 강요하는 셈

재판부는 "남성이 해악적 문제를 수반하지 않는 방법으로 여성을 유혹하는 성적 행위에 대해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억제돼야 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유혹의 방법은 남성의 내밀한 성적자기결정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또한 애정행위는 그 속성상 과장이 수반되게 마련"이라며 "이러한 관점에서 형법이 혼전 성관계를 처벌하지 않는 이상, 혼전 성관계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통상적 유도행위 또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이 혼전 성관계를 요구하는 상대방 남자와 성관계를 가질 것인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한 후 자신의 결정이 착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방 남성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부인하는 행위"라고 덧붙였다.

또한 "혼인빙자간음죄가 다수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여성 일체를 '음행의 상습 있는 부녀'로 낙인찍어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보호대상을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로 한정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고전적 정조관념에 기초한 가부장적·도덕주의적 성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셈이 되고 만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결국 이 사건 법률조항은 남녀평등의 사회를 지향하고 실현해야 할 국가의 헌법적 의무에 반하는 것이자, 여성을 유아시(幼兒視)함으로써 여성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사실상 국가 스스로가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부인하는 것이 되므로, 결국 이 사건 법률조항이 보호하고자 하는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개인의 성행위와 같은 사생활의 내밀영역에 속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그 권리와 자유의 성질상 국가는 간섭과 규제를 가능하면 최대한으로 자제해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맡겨야 하며, 다른 생활영역과는 달리 사생활, 특히 성적 사생활 영역에서 형법적 보호의 필요성과 형벌의 필요성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혼과 성에 관한 국민의 법의식에 많은 변화가 생겨나 여성의 착오에 의한 혼전 성관계를 형사 법률이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필요성은 이미 미미해졌고, 혼전 성행위를 유발하는 빙자의 방법과 관련해 혼인빙자에 의한 간음으로부터만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국가의 과제가 아니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혼인빙자간음죄 폐지, 세계적인 추세

재판부는 "성인 부녀자의 성적인 의사결정에 폭행·협박·위력의 강압적 요인이 개입하는 등 사회적 해악을 초래할 때에만 가해자를 강간죄 또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 등으로 처벌받게 하면 족할 것이고, 성인이 어떤 종류의 성행위와 사랑을 하건, 그것은 원칙적으로 개인의 자유 영역에 속하고, 다만 그것이 외부에 표출되어 명백히 사회에 해악을 끼칠 때에만 법률이 이를 규제하면 충분하다"고 밝혔다.

아울러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활동이 활발하여짐에 따라 여성의 생활능력과 경제적 능력이 향상됨으로써 여성이 사회적·경제적 약자라는 전제가 모든 남녀관계에 적용되지는 않게 됐고, 여성도 혼인과 상관없이 성적자기결정을 하는 분위기가 널리 확산됐다"며 "그럼에도 국가가 나서서 상대방 남자만을 처벌한다는 것은 아직도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보아 여성을 비하하는 것이 된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으로도 혼인빙자간음죄를 폐지해 가는 추세이며 일본, 독일, 프랑스 등에도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고, 게다가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 보호라는 목적과는 달리 혼인빙자간음 고소 및 취소가 남성을 협박하거나 그로부터 위자료를 받아내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폐해가 종종 발생하는 것도 위헌 판결의 근거가 됐다.

이강국, 조대현, 송두환 재판관 합헌의견

반면 이강국, 조대현, 송두환 재판관은 "이 사건 법률조항에 대한 입법자의 판단은 혼인빙자의 상대가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인 경우에는 '음행의 상습 있는 부녀'의 경우보다 혼인빙자로 인해 기망에 빠져 정교에 응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므로, 음행의 상습 있는 부녀를 불합리하게 차별한다고 보기 어렵고, 가부장적 정조관념이나 부녀의 혼전 순결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며 합헌 의견을 냈다.

이들은 "남성이 혼인할 의사가 없으면서 혼인하겠다고 속이는 행위까지 헌법에 의해 보호되는 사생활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남자의 거짓 언행으로 인해 여성이 피해를 입고 고소한 경우 수사하고 처벌하는 것은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하고, 남자가 혼인빙자행위라는 부정한 수단을 사용한 이상, 상대방 부녀가 거짓을 알아차리지 못한 과실이 있다고 해서 혼인빙자 간음행위의 가벌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혼인빙자간음 #성적자기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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