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 한국할매, 알고보니 '그린게릴라'

도시에서 시티파머로 살아가기

등록 2009.12.01 09:49수정 2009.12.0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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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주간잡지인 <한겨레21>(783호)에서 '시티파머(city farmer)'에 관련된 글을 읽게 되었다. 주말농장을 하는 도시인들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의 '도시농부'에 대한 것이었다.


주말농장이 거주지를 벗어난 도시근교에 조성되어 주말에만 주로 갈 수 있는 곳을 말한다면, 시티파머는 집안 베란다나 건물 옥상 등에서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땅이 없으면 화분이나 자루 같은 곳에 흙을 채워서라도 그곳에 채소따위를 심어 먹으려 하는 도시농업 바람이 불고 있다면서 그렇게 농사짓는 사람들을 시티파머, 곧 도시농부라고 한다는 기사였다.

이런 텃밭농사의 활성화로 '전문텃밭관리사'라는 직종까지 생기게 되었단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파트 단지 1층에 살고 있는 주민이 베란다 앞 땅을 조그맣게 일궈 취나물을 심는 행위도 도시농업이고, 건너편 단지 내에 손바닥만한 빈 공간을 일궈 먹을거리를 심는 사람들도 '시티파머'구나 싶었다. 그 기사는 런던, 일본, 뉴욕 등을 소개 하면서 '이제 세계도시들이 녹색으로 갈아입고 있다'고 했다.

a 도시농업 뉴욕에 살고 있는 동생이 찍어 보낸 사진이다. 보이는 건물은 동생네가 살고 있는 아파트고, 사진 맨 앞에 삐죽삐죽 나온 파릇한 싹이 엄마가 심어 놓으신 마늘이란다.

도시농업 뉴욕에 살고 있는 동생이 찍어 보낸 사진이다. 보이는 건물은 동생네가 살고 있는 아파트고, 사진 맨 앞에 삐죽삐죽 나온 파릇한 싹이 엄마가 심어 놓으신 마늘이란다. ⓒ 박금옥


뉴욕에서도 일고 있다는 '도시텃밭' 관련 글을 읽다가 뉴욕에서 이것을 실천하고 계시는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물론 엄마는 뉴욕에 불고 있다는 '도시텃밭조성사업'이나 '그린 게릴라' 단체는 모르신다.

우리엄마도 따지고보면 '그린게릴라'

친정엄마는 올해 여든이시다. 십여 년 전에 이민 간 여동생네를 따라 뉴욕 퀸즈 지역에 들어가 사신다. 엄마나 동생과 통화를 할 때면 농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종종 나눌 때가 있다. 엄마는, 지금 밭에서 무엇을 심어서 얼마큼 자랐고, 무엇 무엇을 뜯어다 먹었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럴 때마다 뉴욕이란 도시에서 웬 농사인가 싶어 뜬금없다는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동생이 "엄마가 여름 땡볕에 그 밭에서 지내시느라 얼굴이 까맣게 타고 몸집도 더 줄어드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그만 하시라고 성화를 부려도 "요란 떨지 마라,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아냐?"며 일축하시고는 몇 년이 지나도록 해마다 하고 계신다. 젊은 시절에 혼자되셔서 우리들을 무탈하게 길러내신 여력에만 감탄을 했지, 낯선 땅에서 주눅 들지 않으시고 도리어 땅을 일구어 생명을 길러내는 일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겼던 날들을 반성하면서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그 밭을 만들기까지의 얘기를 일부러 청해 들었다.

a 텃밭가꾸기 밭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시는 엄마,  함께 이웃해서 밭을 일구고 있는 다른 한국할머니들의 밭은 아직 김장채소가 남아있다.

텃밭가꾸기 밭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시는 엄마, 함께 이웃해서 밭을 일구고 있는 다른 한국할머니들의 밭은 아직 김장채소가 남아있다. ⓒ 박금옥


"말도마라.... 내가 농사꾼이잖니."


엄마는 강원도 농촌이 고향이시다.

"여기 아파트 안에도 텃밭이 있어. 수도도 설치되어 있지. 하지만 거기는 이미 사람들이 맡아서 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

엄마는 '농사꾼'이기에 근처를 돌아보았다고 했다. 동생네가 사는 아파트단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엄마가 지금 땅을 일구고 있는 그곳에 한국 할머니 몇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더란다. 그곳은 아마도 아파트 밖의 공한지 같은 곳인데 아파트회사 땅으로 소나무와 낙엽송 같은 나무와 그 나무에서 떨어진 검불들 때문에 햇볕이 잘 들지 않고 잔디도 자라지 않는 곳이었다고 한다. 회사는 그곳에 나뭇가지나 쓰레기 등을 그냥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런 잡동사니로 뒤덮인 시커먼 자투리땅에 엄마는 무조건 나뭇가지들을 치우고 호미를 들이댔단다.

a 도시농업 멀리 아파트가 보이고, 그 옆이 잔디밭이다. 그 잔디밭을 넘어 나무들 숲 사이 버려진 땅을 한국할머니들이 개간한 것이다.

도시농업 멀리 아파트가 보이고, 그 옆이 잔디밭이다. 그 잔디밭을 넘어 나무들 숲 사이 버려진 땅을 한국할머니들이 개간한 것이다. ⓒ 박금옥


척박한 땅이 그린으로 변하던 순간

"사람들이 뻔히 쳐다보더라고, 낭중에 그 사람들이 그러는데 저런 척박한 곳에 무엇을 심겠다고 달겨드는 조그만 노인네가 한심스러워 보였는데, 8평 정도의 땅을 일구어 채소를 길러 내는 것을 보고는 '지독한 할매네' 했다고 하더라만. 힘들지, 수도가 놓여 있지 않아서 물을 집에서 길러다 부어야 했거든."

아파트 안에 있는 텃밭의 수돗물을 처음에는 못 쓰게 하더니 이제는 그 곳의 물도 쓰게 한단다. 동생 내외는 가게에 나가니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걱정 마라, 누가 하라고 하면 하겠냐? 재미나니까 하는 거지, 땅이 넓고 햇볕이 잘 들기만 한다면 더 실컷 하고 싶다니깐."

처음에는 아파트관리 회사사람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하더니, 잔디도 잘 살지 못하는 시커먼 땅을 바라보는 것보다 푸른빛이 감도는 땅을 보는 것이 훨씬 좋으니까 더 이상 참견하지 않는다고 한다. 농산물을 건지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고 하신다. 엄마 말씀대로 '햇볕이 쨍하니'들어줘야 하는데 나무들이 많아서 그늘이 진단다. 그래도 약치지 않은 채소를 밥상에 올려, 한철 먹을 정도만 되는 것도 얼마나 좋으냐고 말씀하신다.

"마늘이고 파고 사서 먹는 야채는 그 맛을 따라가지 못해. 또 서로 나누어도 먹어, 그 재미지."

올해는 고춧가루 다섯 근을 얻었고, 그 밭에서 뽑은 배추로 김장도 했고, 여름 채소를 거둬들인 곳에는 마늘을 심으셨단다.

"내년 하지 때 거둘 거야" "하지?, 여름에?" "아니, 절기로 따져서 '하지' 때지"라고 설명하신다. 여태 마늘을 심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벌써 세 해 겨울을 심었다고 하신다. 무심했던 마음이 들어 무안해졌다.

"내가 발목이 시리다 못해 아리고 저리면서 정강이까지 시렸거든, 그런데 농사일로 들이뛰고 내뛰고 하다 보니 언제 아팠나 싶다. 무릎? 무릎은 아프지, 사람이 늙었는데 그 정도도 안 아플 수는 없지, 그런 것은 늙어서 아픈 것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a 텃밭가꾸기 11월 26일에 찍어 보낸 사진인데 뉴욕의 더운 날씨 때문에 이웃하고 있는 밭의 배추들이 아직 싱싱하다.

텃밭가꾸기 11월 26일에 찍어 보낸 사진인데 뉴욕의 더운 날씨 때문에 이웃하고 있는 밭의 배추들이 아직 싱싱하다. ⓒ 박금옥


엄마의 올 해 겨울도 조금 덜 추울 듯하다. 땅 속에 묻혀 있는 마늘은 그냥 묻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겨울 땅속에서 생명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엄마 또한 보이지 않는 땅 속의 마늘을 향한 기대로 건강한 겨울을 보내실 것이다.

여든의 엄마는, 도시농업이라는 거창한 어떤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어도 도시를 푸르게 하고 있다. 친환경으로 농사를 지어서 식탁과 땅을 살리고, 당신의 몸도 건강하게 만들고 계신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뉴욕의 한복판에서 진정한 '시티파머'로 자연을 다독이며 살아가고 있다. 얼굴도 설고, 말도 선 미국 땅이지만 척박한 도시의 삶을 푸른 생명으로 가꾸고 있는 것이다. 

밭 사진 좀 찍어 보내라고 동생에게 얘기 했더니 이미 김장이 끝나서 "휑한데?" 한다.
보이는 것은 그렇지만 그 땅속에는 분명 마늘이 생명활동을 하고 있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엄마의, 밭을 향한 정성은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시티파머 #친정엄마 #뉴욕도시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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