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요, 대통령 신분으로 하원의원 출마?

[필리핀] 기득권 층이 장악한 정치판, 토호나 재력가 외엔 출마 어려워

등록 2009.12.04 09:59수정 2009.12.0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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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현직 대통령이 재임 중 자기 고향에서 하원의원 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1일, 자기 고향인 팜팡가 주 루바오 시에서 하원의원 출마를 공식 선언한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고향사람들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선거관리위원회의 승인 하에 헌정 사상 최초로 이런 시도를 감행했다.

 

그녀의 이런 시도에 대해 피델 라모스 필리핀 전직 대통령(1992-1998년 재임)은 "자기 고향에 자주 들락날락거리고, *1)마긴다나오 학살에 침묵하던 그녀가 결국 출마 선언을 했다"며 "선거의 공정함을 위해선 대통령 자리에서 사임한 뒤 다른 후보자들과 같은 위치에서 유세를 진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고 12월 3일자 필리핀 일간지 <데일리 인콰이어러>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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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요 대통령의 홈페이지 모습. ⓒ 아로요 홈페이지

아로요 대통령의 홈페이지 모습. ⓒ 아로요 홈페이지

 

현직 대통령의 하원의원 출마 선언?

 

대통령으로 재직한 아버지(디오스다도 팡간 마카파갈, 1961년~1965년 대통령)를 둔 아로요 대통령은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주부가 된 후에도 대학 등지에서 경제학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주목받았다. 필리핀 수도 메트로 마닐라에 거주하는 30대 에스페레토씨는 "대통령이 되기 전, 그녀는 경제 문제에 유능하고, 사회복지 및 여성 문제에 있어 진보적이라 여겨졌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녀가 대중의 지지를 업고 부통령으로 재직하던 중, 에스트라다(조지프 에헤르시토 에스트라다, 1998년~ 2001년 재임) 전 대통령이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제2차 민중혁명으로 물러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자동 승계하게 된다. 이후 2004년 대선에서 그녀는 승리해 총 10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게 됐다.(필리핀의 차기 대선 및 총선은 내년 5월이다.) 10년의 권좌 유지는 독재자로 알려진 '마르코스(페르디난드 에드랄린 마르코스, 1965년~1986년 재임)'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필리핀 헌정사상 가장 긴 기간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통령직 자동승계부터 대선 승리까지 끊임 없는 의혹을 받아왔다. '엔카르나시온 타뎀' 필리핀 국립대학 교수는 그의 논문 <필리핀의 민주화 이행과 계속되는 우경화>에서 그녀의 대통령직 승계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아키노 행정부 시절 우경화는 군부가 8번의 쿠테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듯이,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사임과 대통령 승계과정 상에 벌어진 *2)여러 사건에 위협을 느낀 아로요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 생명 연장을 위해 군부에 더욱 의지하면서 정권의 우경화가 진행됐다."

 

2004년 대선 승리 역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선거에서 아로요 대통령은 페르난도 포 주니어 후보를 110여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했다. 문제는 그녀가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의장이었던 가르실야노와의 통화 도청 테이프가 대중에 공개되면서부터인데, "당시 테이프 내용은 그녀가 가르실야노 의장에게 적어도 100만 표 이상의 차이로 당선하도록 득표를 조작해 달라는 뉘앙스를 풍겼다"고 2005년 9월 17일자 <데일리 인콰이어러>는 보도했다.

 

이런 일련의 의혹이 풀리지 않으면서 그녀는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이로 비치고 있다. 올해 필리핀의 시민사회 양대진영인 '바얀(Bayan, 신 애국동맹)'과 '악바얀(Akbayan, 필리핀 대안정당)'은 "그녀가 하원의원에 공식 출마하고, 자신의 측근들로 장악된 하원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단행한 후, 총리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며,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목소리를 냈다.

 

야당을 통해 제기되는 '부정부패 면죄부 선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이다. 남편과 현직 하원의원인 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부정부패 문제는 그녀의 재임기간 내내 제기되었고, 이 기간중 비정상적인 속도로 불어난 그녀의 재산축적 과정 역시 제대로 설명된 적은 없다. 또한 그녀의 남편은 불법 도박 스캔들 및 각종 기관 인사 등의 압력 행사 등으로 외국에 피해있기도 했으며, 아들은 얼마 전 미국의 부동산 구입 비용에 대해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어떠한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부정부패 의혹들이 다음 정권에서 조사될 것을 예상하고, 그녀가 '면책특권'을 노리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가톨릭주교회(필리핀은 국민의 80%가 카톨릭 교도임)는 그녀의 하원의원 출마 선언 이후 발표한 성명에서 "아로요 대통령은 출마하지 말아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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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중북부 산악지대 도로 건설 현장,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곳마다 '아로요' 대통령의 얼굴과 지방 관리 얼굴이 함께 자리잡은 채 거대한 간판이 서 있다. ⓒ 고두환

필리핀 중북부 산악지대 도로 건설 현장,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곳마다 '아로요' 대통령의 얼굴과 지방 관리 얼굴이 함께 자리잡은 채 거대한 간판이 서 있다. ⓒ 고두환

 

기득권 층이 장악한 정치판, 아로요 대통령은 상징적 인물일 뿐

 

'필리핀의 대표적 도시빈민 지역 중 하나인 라구나 호수 근처에 살아가며 바랑가이(우리나라의 '동' 정도 행정구역) 장에 출마한 경험이 있는 루디씨는 "필리핀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문제는 선거에 있어서 모두가 입후보 할 수 없다는 것이다"며 "입후보 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해지고, 설사 한다 치더라도 천문학적인 선거 자금을 댈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필리핀의 가장 큰 시민사회 진영인 '바얀'은 지난 10월 열린 한 강연회에서 "필리핀에선 선거를 치르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과 연줄이 필요한데, 중앙 정부에서 지방 정부로 내려오는 예산을 빼먹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은 서로 눈감아주는 기득권층의 행위에서 비롯된다"며 "특히, 아로요 정부는 자신과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는 이에 대해 정치살인(정치인, 학자, 시민사회 활동가 포함 1000여 명 이상)을 단행해 왔다. 급진적 세력만을 살해했던 독재자인 마르코스보다 더하다. 그녀의 영향력 아래 누구도 출마하는 게 쉽지 않다"고 의견을 밝혔다. 대안정당 '악바얀'은 "대통령 후보를 내는데만도 최소 300여억 원의 자금이 든다"고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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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대선 후보인 '노이노이 아키노', 하지만 그 역시 정치 가문, 토호 가문 출신이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지금까지 받고 있다. ⓒ 노이노이 아키노 홈페이지

유력 대선 후보인 '노이노이 아키노', 하지만 그 역시 정치 가문, 토호 가문 출신이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지금까지 받고 있다. ⓒ 노이노이 아키노 홈페이지

 

실제 선거 움직임은 이런 의견들과 일맥상통한다. 현재 필리핀 유력 대선 후보인 노이노이 아키노(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3세) 역시 그의 어머니가 대통령 출신이며, 그의 부통령 후보인 '말 로하스' 역시 그의 할어버지가 대통령 출신이다. 그리고 이들을 비롯한 대다수 대선 후보는 지방 토호 출신 혹은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재력가이다. 거기에 독재자의 부인이자 사치스런 '3천 켤레 구두'로 유명한 이멜다와 대통령 직에서 쫓겨났던 에스트라다는 아로요 정권에서 면죄부를 받고, 각각 하원의원과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다.

 

제 1차 민중혁명 시 약속되었던 토지분배는 필리핀 사회에서 여전히 요원하다. 국가 전체 예산의 30%는 매해 다른 국가에 대한 부채 상환으로 쓰이고 있으며, 1995년부터 절대빈곤율 개선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 중이다. 아로요 정부 내에서 도시빈민 지역을 중심으로 강제 철거가 무자비하게 진행됐으며, 그녀의 재임기간 중 내각은 '아로요 가문'의 부정부패 사건이 불거졌을 때, 그녀의 퇴임을 요구하며 사퇴하기도 했다.

 

여전히 선거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혹은 많다. 무자비한 학살 사건에도 아로요 대통령과 암파투안 가문 간의 정치 동맹은 깨지지 않고 있고, '내년에 실시될 전자투표 제도가 선거 조작을 더욱 쉽게 할 것'이라는 우려도 계속되고 있다.

 

아로요 대통령이 보여주는 비상식적인 행동은 필리핀 사회 구조의 상징적인 모습일 뿐이다. 기득권 층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권좌를 유지하려 시도하고, 그 안에 국민들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지금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진실들이다. 그녀의 행보에 많은 파장이 예상되는 가운데, 내년 5월 총선거를 앞두고 필리핀 정국의 향방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됐다.

 

덧붙이는 글 | 1) 마긴다나오 학살 : 지난 11월 23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 마긴다나오 주에서 언론인 30여 명을 포함한 57명이 학살된 사건, 봉건형태의 사회가 유지되는 해당지역에선 현재 집권하고 있는 암파투안 가문이 다음 선거에 등록 시도를 하는 다른 집안의 행렬을 막아선 후 학살했으며, 암파투안 가문은 아로요 대통령과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다. 또한 2004년 대선에서 암파투안은 아로요 대통령의 선거 조작을 도왔다는 의혹 역시 받고 있다.

2) 여러사건 : 3차 민중혁명이라 불리는 사건, 에스트라다(빈민 출신의 영화배우)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그는 여전히 기득권의 대항마라며 그의 복권을 주장한 사건. 논문은 이런 시도가 필리핀 앨리트가 자신의 부를 빈곤층과 공유하는데 실패했다고 바라봄.

2009.12.04 09:59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1) 마긴다나오 학살 : 지난 11월 23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 마긴다나오 주에서 언론인 30여 명을 포함한 57명이 학살된 사건, 봉건형태의 사회가 유지되는 해당지역에선 현재 집권하고 있는 암파투안 가문이 다음 선거에 등록 시도를 하는 다른 집안의 행렬을 막아선 후 학살했으며, 암파투안 가문은 아로요 대통령과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다. 또한 2004년 대선에서 암파투안은 아로요 대통령의 선거 조작을 도왔다는 의혹 역시 받고 있다.

2) 여러사건 : 3차 민중혁명이라 불리는 사건, 에스트라다(빈민 출신의 영화배우)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그는 여전히 기득권의 대항마라며 그의 복권을 주장한 사건. 논문은 이런 시도가 필리핀 앨리트가 자신의 부를 빈곤층과 공유하는데 실패했다고 바라봄.
#필리핀 대선 #아로요 대통령 #필리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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