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독놈덜은 으찌케 잠을 자는지 몰러"

영화를 보며 잊었던 과거를 기억해내는 어머니

등록 2009.12.03 17:43수정 2010.01.1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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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니 노래하고 춤추는 그림들이 텔레비전에 자주 나온다. 엊그제 어머니가 문득 '콩밭 메는 아낙네야'로 시작되는 노래 한 소절을 따라 부르시는데 그 초성이 마치 내가 언제 치매 따위에 걸렸더냐 싶게, 풀잎이 떠는 듯하고 굵은 밧줄이 몸을 휘감는 듯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엄마, 엄마, 뭐해? 노래 해?"

 

어머니의 노래를 듣고 있던 내 입에서 얼결에 나온 말이 겨우 그 정도였다. 텔레비전을 봐도 그저 그림이나 볼 뿐 내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어머니이고 보면 내가 놀라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그 전날 버려진 무 밭에서 "이러면 죄로가, 벌 받는당게" 하면서 무 하나라도 더 줍자고 우기는 어머니에게서 상서로운 조짐을 느끼기는 했었다.

 

아들이야 그렇게 놀라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그 뒤로도 잠시 더 따라 부르다가는 더 이상 기억이 안 나는지 입을 꾹 다물고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옆에서 아들이 자발스럽게 잡음을 넣은 탓으로 그만 기억이 오다가 돌아가 버렸는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나로서는 안타깝고 초조한 심사인 채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그냥 지켜보기나 해서 될 일은 아니고,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꼭꼭 숨어 버렸던 어머니의 기억이 마침내 머리꼭지를 보이기 시작한 지금 나는 무엇으로 보조를 해야 하는가, 등등 연구 끝에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십여 년 전부터 손에 돈만 들어오면 사 모으곤 했던 비디오가 집안 곳곳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사라진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생애에서 가장 슬펐거나 기뻤거나 감격적이었던, 혹은 충격적이었던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나 소리가 좋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생애에서 슬픔과 충격 그리고 감격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사건을 들자면 아무래도 열세 살에 결혼을 해야만 했던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그 시절은 내가 세세하게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까닭으로 일단 춤바람이 날 뻔했던 어머니의 중년 시절 한 대목을 다뤄보기로 하고 일본 영화 <셀위댄스>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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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셀위댄스' 중에서 ⓒ 김수복

영화 '셀위댄스' 중에서 ⓒ 김수복

영화 셀위댄스가 춤바람이 날 뻔했던 어머니의 중년 시절과 눈곱만큼이라도 연관된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춤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살아 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일종의 몸부림 같은 것이라고 본다면 정서적으로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그림이 많다는 생각이었다.

 

반응은 십 분도 채 안 돼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게 어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이어서 "중국 사람인가 일본 사람인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고 "일본말인가본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말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춤추는 장면에서 관심을 집중하는 어머니의 눈. 아, 내 생각이 제법 적중했나보다. 때를 놓치지 않고 불쑥 질문을 한다.

 

"엄마, 창림양반 기억해?"

"아 그 인간을 내가 잊었으까. 그 나쁜, 그 징헌, 도독. 노옴을."

 

마치 내가 그 질문을 해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식이었다. 단 1초의 망설임이나 생각하는 시간도 없이 어머니는 대번에 진저리를 치는가 싶더니 눈앞에 있으면 물어뜯기라도 하겠다는 듯 입을 오물오물 하다가는 드디어 잡아 뜯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데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양쪽 볼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창림양반이란 우리 마을에서 그 비슷한 종류를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완전히 독보적인 한량이었다.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에서 배짱이를 쏙 빼닮았다 싶기는 하지만 배짱이처럼 구걸을 하거나 겨울 한철 굶어죽을까 걱정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일손이 바쁜 계절이라 해도 시정에 앉아 따닥 딱 북을 뚜다리며 육자배기나 단가 혹은 판소리 가운데 어떤 대목 같은 것들을 목청도 좋게 뽑아내는 그는 언제나 당당했고 여유가 만만했다.

 

그렇게 살아도 좋을 정도의 토지를 실제 그가 소유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농사는 비교적 많이 짓고 있었다. 그의 매제가 경찰관인데 매년 몇 마지기씩 처남의 이름으로 땅을 사서 관리를 맡긴다는 확인하기 어려운 소문은 있었다. 아무튼 머슴을 부리고 거의 매일 삯군을 사는 등으로 먹고 사는 일에 궁하지 않은 그는 농사철에 오랜 기간 비가 안 와서 마을이 온통 시름에 빠졌어도 지나가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가 누구든 붙잡아 앉혀놓고 술을 따라라, 마셔라, 노래 한 곡 뽑아라, 하는 식으로 사람을 자주 난처하게 만들어놓곤 했었다.

 

마을 사람들의 창림양반에 대한 태도는 뭐라고나 할까, 만나면 피하고 싶어지지만 피하고 나면 이내 돌아서서 어울리고 싶어지는 그런 애매한 관계라고나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거의 같았다. 남자들에게는 부담스럽지만 결코 싫지 않은 술벗이었고, 여자들에게는 밉지만 한 번 더 보고 싶어지는 그런 남자였다. 때문에 그날 일을 망쳐서 부부싸움은 할지언정 창림양반을 원망하는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창림양반 본인의 순수한 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창림양반의 형님은 근동 삼십 리 안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호남이었고 미남이었다. 목소리는 항상 속삭이듯이 부드러웠고 어찌나 세심하게 자상한지 길에서 코흘리개 아이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코를 닦아주곤 했다. 게다가 똑똑하기는 대통령이라도 할 것 같았고 머리도 뛰어나게 총명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육이오 즈음에 좌익 활동을 이유로 고창 읍내 사거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다 아는 총살 사실을 그 어머니는 모르는 채로 이십 년이 넘도록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불쌍헌 집안이여."

 

어머니의 표현으로는 그랬다. 그것은 아마 대다수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정서일 터이었다. 그러니까 창림양반이 그렇게 일도 안 하고 다른 사람마저 일을 못하게 하는데도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의 훤칠한 외모와 풍류 못지않게 비극적인 가정사도 크게 한몫 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그는 마을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점차 사기꾼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그때가 팔십년대 초반이었다.

 

서울에서 최루가스에 쩔어버린 몸을 좀 씻고자 하는 생각으로 고향을 찾았는데 어머니가 안 계셨다. 술집에나 계셔야 할 아버지가 괜히 빙글빙글 웃어가며 한 마디 하시는데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느그 어매 바람 났다, 야. 춤바람 났어."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었지만, 나중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직 바람이 날 단계는 아니었다. 창림양반이 북 치고 노래하는 데도 이제는 싫증이 나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독선생을 모셔다가 기본부터 아주 철저하게 배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싼 선생을 모셔놓고 혼자서만 배우기는 아까우니 마을 사람 가운데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아버지는 풍류 가무에 영 소질이 없어서 참가를 안 하고 어머니만 나가시는 중이라는 거였다.

 

"아니 아버지, 어머니 저러다 정말로 바람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보고만 계세요"

"그까짓 바람이 뭘 무섭데? 뺄 것 다 빼린 사람이 뭘."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아버지에게 한 마디 걱정을 드렸다가 무안만 당했다. 뺄 것 다 빼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앞으로 아이를 낳을 사람도 아닌데 바람도 까짓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었던 거다. 팔십년대라는 시대가 그렇게도 참 이상하게 풀어진 시절이었다. 면소재지에는 이미 댄스홀도 들어와 있었다. 제비니 꽃뱀이니 하는 직업이 본격적으로 데뷔를 한 시기도 아마 그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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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셀윈댄스'에서 레슨 장면. 어머니는 전례 없는 관심으로 이 장면에 몰입하고 계셨다. ⓒ 김수복

영화 '셀윈댄스'에서 레슨 장면. 어머니는 전례 없는 관심으로 이 장면에 몰입하고 계셨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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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몰입한 어머니. 근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 김수복

영화에 몰입한 어머니. 근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 김수복

아무튼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을이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창림양반이 야반도주를 했다는 거였다. 마을 사람 어느 누구도 창림양반에게 돈이 안 걸린 사람이 없었다. 돈이 없는 사람은 하다못해 품삯이라도 걸려 있었다. 품삯도 하루 이틀치가 아니었다. 꽤 오래 전부터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 사람은 사, 오개월치가 밀려 있기도 했다. 품삯을 못 받은 사람 가운데 어머니도 들어 있었다.

 

"엄마는 그때 얼마나 떼인 거여?"

"몰라 나도."

"모르긴 뭘 몰라. 창림양반 도망간 것은 알잖어."

"아 금매 그맀당게. 그 썩어도 못 죽을 인사가, 나도 그때 이틀치던가 사흘치던가.못 받은 것이."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작 그 정도 떼먹으려고 야반도주까지 했단 말여?"

"음마아, 그랬당게."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그때 떼인 품삯은 이틀 사흘치가 아니었다. 봄철 보리밭 김매기부터 시작해서 여름철 보리타작과 모내기까지 끝내줬다고 했으니 날짜로 치자면 최소한 오십일은 되었다. 오십일 분의 품삯이라면 어머니에게는 아주 큰 돈이었다. 그리고 그 돈을 받으면 어디어디에 어떻게 쓰겠다는 아주 세세한 계획이 다 세워져 있었을 것이었다. 계획이란 보나마나 참고서 한 권 제대로 사줘본 적이 없는, 육성회비 한 번 제때 줘본 적이 없어서 늘 마음이 아팠던 자식들과 연관된 것이겠지만.

 

"생각해봐. 기억 안 나?"

"아 믓얼?"

"창림양반한테 떼인 돈이 이틀치가 아니라 오십일치였잖아."

"아이고 몰러어. 아 근디 도독놈덜은 어찌케 잠을 자는지 몰러. 다리는 뻗어질랑가? 눈은 감아질랑가? 숨소리는 낼랑가?"

 

어머니는 계속 동문서답이다. 아니 어쩌면 동문서답이 아닌지도 모른다. 아, 그런가보다.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떼인 돈이 얼마냐 따위가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배반한 자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체내에 쌓이고 쌓여서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야 어떻든 나로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소득이었다. 어머니의 기억이 그만큼이라도 되살아날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한 사기꾼 창림양반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다면 그도 어언간 칠십 후반 팔십이다. 어머니의 말씀마따나 그간 잠이나 제대로 발 뻗고 잤을 것인지, 숨은 잘 쉬었을 것인지, 별 소용도 없을 안부마저 묻고 싶은 시간이다.

2009.12.03 17:43 ⓒ 2010 OhmyNews
#기억의재생 #영화와기억 #팔십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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