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선생 영각
김현숙
대나무 숲에는 90 평생 중 76년간을 관직에 헌신하며 그중 24년은 재상으로 국정을 총괄해 국태민안과 태평성대를 이룩한 정치가이며 청백리로 현재까지 청백리로 공직자의 귀감이 되는 황희 선생의 영각이 있다. 대원사와 선생의 인연이 궁금해 알아보니 1419년 남원에 유배되어 근신하시며 경서와 시운을 탐구하던 중 동향의 선배이자 대덕고승인 자진원오국사께서 높은 수행과 선도로 종풍을 크게 진작시킨 대원사를 찾아 사찰환경개선과 불사에 조력했다고 한다.
그 후 1455년 선생의 넷째 아들 직신공이 인근 파부현에 터를 잡고 살면서 정책적으로 탄압받던 대원사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사찰을 잘 보살펴준 황희 선생과 그의 아들 직신공의 송덕을 영원히 기리고자 대원사 선도들이 영각을 건립하고 선생의 진영을 봉안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여순사건으로 대원사가 불타면서 영각마저 소실되어 황씨 광주 보성 종친회의 협조로 2002년 선생의 영정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우리들의 입버릇처럼 황희 정승이라 부르지 않고 황희 선생이라고 하는 게 이상하고 낯설었다. 나는 황희 정승을 참 좋아한다. 황희 정승 하면 아들이 술에 취해 다니자 이를 나무래도 소용이 없어, 어느 날은 의관을 정제한 채 취해 들어오는 아들을 손님처럼 정중히 맞이하여 아들의 술버릇을 고치게 했던 일화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소박하면서도 다양한 대원사는 절 분위기가 전혀 달라 오래 머무르고 싶게 한다. 각종 문화행사도 하고, 외국 근로자를 위한 일도 하고, 생명 나눔 실천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도 나누는 대원사에서 무등산 풍경소리 음악회를 개최할 때는 이해인 수녀님, 이애주 무용가 등도 내려와 함께 했었다.
그때 처음 만난 현장 스님의 세상을 향해 활짝 연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아있어 자주 가는데 오늘 오랜만에 다시 가보았다. 겨울임에도 손가락은 시리지만 따스해보였다. 그것은 어쩌면 엄마아빠에게 버림받은 어린 영혼들을 보듬어주는 지장보살의 미소 때문이 아니었을까. 벚꽃 터널이 아름다울 때 다시 가야겠다. 꽃 속에서 웃는 동자상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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