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로 적힌 책, 우리는 왜 볼 수 없나

장애인의 책 읽을 권리 가로막는 저작권

등록 2009.12.17 18:36수정 2009.12.17 18:36
0
"기말 고사를 사흘 앞두고서야 강의 교재를 받게 되었어요."
"올해(2009년) 치를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올해 수험서를 볼 수 없어 2007년 수험서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어요."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교육 수준이 뒤떨어진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교육열이 세계에서 1위를 달리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눈이 좋지 않아 인쇄된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점자로 바꾸거나 책의 내용을 녹음해서 시각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시각·청각·지적장애인의 책 읽을 권리

하지만 우리나라 공공도서관 564곳에 있는 책이 5천만권 정도인데 이 가운데 점자나 녹음된 책 등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도록 변환된 책은 10만 종 정도로 0.2%밖에 안 됩니다(한국도서관연감, 2007). 그리고 매년 국내에는 5만여 종의 책이 새롭게 만들어져 나오는데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도록 변형된 것은 1천여 종으로 2%에 불과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장애인(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들은 돈만 주면 어디서나 사볼 수 있는 책이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읽을 수 없습니다. 설령 자신이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책을 점자나 녹음 형태로 바꾸는 데 3개월에서 6개월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필요한 책은 읽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이 아닌 장애인들의 경우야 책을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공부를 하는 학생의 경우는 다릅니다. 필요한 교재나 부교재를 읽지 못하여, 참고 자료를 보지 못하여 공부를 재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시각장애인들만이 아닙니다. 청각장애인들이나 지적장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청각장애인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언어인 수화(手話)를 사용합니다. 비장애인들이 태어나면서 한국어를 듣고 사용하듯이 청각장애인들은 태어나면서 수화로 언어를 인지하고 수화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길 원합니다.

이럴 때 청각장애인에게 수화는 모국어가 되며 한국어는 제2언어가 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영어를 배웠음에도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청각장애인에게 한국어는 자연스럽지 못한 언어입니다. 이렇다 보니 책을 읽는 데도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청각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수화로 만들어진 책이 필요합니다. 이는 지적장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지적 능력이 비장애인에 비하여 덜 발달되어 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바꾼 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책들이 시범적으로 만든 몇 종류 밖에 없어 청각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들이 자신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걸림돌, 저작권

우리나라가 어렵게 사는 것도 아닌데, 다른 나라에 비하여 관련 기술이 뒤떨어진 것도 아닌데 왜 장애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책을 마음대로 읽지 못할까요? 대표적인 원인은 저작권 문제 때문입니다. 앞서 적었듯이 시각이나 청각장애인 그리고 지적장애인들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형태로 변형해야 합니다.


문제는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야 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최근에 저작권법과 도서관법이 개정이 되어 시각장애인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습니다. 개정된 도서관법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책을 납본하는 경우 디지털파일도 제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책을 디지털 파일로 받을 수 있다면 음성인식프로그램을 통하여 시각장애인이 책의 내용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책이 출판된 후 3개월 이상 기다렸다 책을 읽는 불편이 사라지며, 원하는 책을 골라서 볼 수 있습니다. 개정된 저작권법도 장애인복지 등 비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기관에서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도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제작하거나 전송할 수 있게 하여 시각장애인들의 독서의 기회를 넓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률이 개정되었다고 장애인들의 책 읽을 환경이 완전히 개선된 것은 아닙니다. 우선 책을 납본하는 이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디지털파일을 납본하지 않았을 경우 납본하라고 강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개정된 법령은 시각장애인의 책 읽을 권리의 일부만 인정했을 뿐입니다. 청각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 등 그 외의 장애인들이 책을 읽을 권리는 여전히 보호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로, 정보사회가 가속화되면서 e-book 등 디지털 책들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장애인들이 잘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시각, 청각, 지적장애인의 인터넷 사용률은 비장애인에 비해 40% 가량이나 차이가 납니다. 즉, 시각, 청각, 지적장애인들은 인쇄된 책만이 아니라 디지털로 만들어진 책,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책이나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워 이중, 삼중의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개정된 법령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장애인이 책을 읽을 권리를 위해서 저작권자에게 디지털 파일제공을 의무화하여야 하는데 정부는 저작권자가 피해를 받을 수 있다며 이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작권자가 제공하여야 할 디지털파일은 점자 출력용이나 시각장애인의 음성프로그램 출력용으로 변형된 것이라 비장애인들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디지털파일로 장애인들에게 제공하더라도 저작권자가 피해를 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저작물의 무단유출 등 저작권자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장애인들의 요구를 당장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현재 국회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장애인의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2007년에 만들어진 법)을 개정하려고 논의하고 있는데, 법률에 장애인이 책을 읽는데 차별을 받지 않도록 저작권자가 디지털파일도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넣으려 하고 있지만 정부의 이러한 입장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정보의 격차가 삶의 격차를 만든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장애인의 정보 격차는 매우 큽니다. 또한 장애인들이 책을 읽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애인들은 재창조를 하는 것은 둘째 치고 한정된 지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 상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학이나 취업 등에서 비장애인과 경쟁을 할 수 없도록 하여 장애인들이 사회의 약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현재 장애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81만 9천원으로 전국 월평균 가구소득(337만원)의 54.0% 수준이며, 장애인 실업률도 비장애인에 비하여 2.5배나 많다는 통계(보건복지가족부, 2008)가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책을 읽을 권리는 부차적인 권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이러한 권리는 저작권의 문제 때문에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정부는 저적권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장애인의 책을 읽을 권리가 장애인의 자기계발과 비장애인과 삶의 격차를 줄이는 정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부는 저작권자에 대한 옹호에 앞서 장애인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장애인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장애인들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 관련법을 개정하고 관련 정책을 개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철환 님은 '장애인정보문화누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김철환 님은 '장애인정보문화누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지적재산권 #저작권 #책 #장애인 #차별
댓글

홈페이지 : cathrights.or.kr 주소 : 서울시 중구 명동길80 (명동2가 1-19) (우)04537 전화 : 02-777-0641 팩스 : 02-775-6267


AD

AD

AD

인기기사

  1. 1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2. 2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3. 3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4. 4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5. 5 올해 포도 색깔이... 큰일 났습니다 올해 포도 색깔이... 큰일 났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