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취하게 하는 인간의 향기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읽고

등록 2009.12.22 11:50수정 2009.12.22 11:50
0
원고료로 응원
a 책 표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책 표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 양철북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지극히 단순하게 제목에 이끌려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펼쳐들었다. 아이들이 어떤 선생님을 좋아할까 궁금해서였지만 속마음은 우리 반 아이들이 나를 향해 그렇게 외쳐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아니었던가 싶다.

초등학교 교사인 고다니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한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현장보고서 같은 느낌으로 시종 나를 사로잡았다. 마치 나도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현장감이 생생하게 전해져 읽는 내내 몇 번이고 가슴을 적시면서 읽었다.


등장인물 중 가장 많이, 가장 오래도록 가슴을 두드린 인물은 데쓰조다. 애지중지 기른 파리를 잃고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퍼하는 아이, 꾸중을 들어도 매를 맞아도, 파리를 기르는 아이, 엄마도 아빠도 없어 세상에서는 아무도 귀여워해 주는 사람이 없는 아이. 파리를 기르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아이.

하지만 고다니 선생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으로 차츰 마음의 문을 열어가고, 문제아였던 데쓰조가 파리박사라고 불리는 재능 있는 아이로 변모해 간다. 글씨조차 쓸 줄 모르던 데쓰조가 쓴 글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 글은 소경이 처음으로 눈떠서 본 세상은 얼마나 감격적일까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그는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이런 데쓰조의 모습은 여러 사람의 삶을 변화시켰다. 

바쿠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처한 환경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산으로 데려가면 데쓰조는 곤충을 기를 겁니다. 강으로 데려가면 물고기를 기르겠지요. 하지만 나는 아무 데도 못 데려갑니다. 이 녀석은 쓰레기가 모이는 여기 밖에 모르고, 여기는 구더기나 하루살이, 그리고 기껏해야 파리밖에 없는 뎁니다." 만일 데쓰조에게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그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쏠렸을 것이다.

거의 자폐증 가까운 반응을 보였던 '데쓰조'가 고다니 선생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 때마다 교사의 정성과 인내심이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가 숙연하게 한다. 마음을 연다는 것. 그것은 힘들고 느리고 답답하지만, 마음이 열리면 말보다 귀중한 것이 통하게 되고 많은 것을 교류하게 된다.

데쓰조와 고다니 선생님의 교류에서 얻은 것은 눈높이를 맞춰 마음을 열면 서로 다르게 생각한 시점이 점점 합의에 이르고 각자의 어떤 성과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남에게 마음을 여는 데는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고다니 선생은 그 아이를 너무 몰랐기 때문에 실수를 많이 한 것 같다는 고백은 나 역시 아이들을 잘 몰라서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했다.


인간이 아름답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저항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해준 고교 시절의 선생님 말도 떠올린다. 선생님의 한 마디는 아이들에 가슴에 남아서 오래도록 살아 움직인다. 교사는 떠나고 없어도 오랜 세월 남아서 아이들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그 한 마디.

아다치와 고다니 선생님이 글 쓰는 방법을 지도하는 수업풍경도 인상적이다. 쉽게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두고 왜 그렇게 어렵게만 지도했을까. 쓰레기장의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는 고다니 선생님에게서 관심을 갖고 행동을 주시하면 보인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사랑과 관심으로 주시해보리라.


세상은 하루 하루가 경쟁이다. 주위 사람을 돌아볼 여유라곤 없다.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이웃을 배려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모순일까. 경쟁하여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스러울 때가 있었는데 그 해답을 미나코 사례에서 찾았다. 장애를 가진 미나코라는 아이를 맡았을 때 아무도 그를 응원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미나코를 맡기로 한다. 그런 신념은 연약한 그녀의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신념을 지켜낼 수 있는 풍토가 부럽다.

학부모도 반대하고, 학교에서도 반대하지만 고다니 선생은 미나코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미나코를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정상적인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감싸 안고 달려야 하는지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아이들은 학급회의를 열어 멋진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차츰 미나코가 지체장애자라는 사실보다 자신들과 함께 교실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는 얼마나 사랑스런 아이들인가. 미나코와 짝이 되는 것을 싫어했던 준이치의 어머니와 달리 준이치는 자기가 미나코에게 마음을 써주지 않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교과서를 마구 찢기 때문이라는 아이 말에 그만 가슴이 뜨거워졌다. 

역자는 마지막 부분을 더 이상 번역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를 숙연하게 했던 마지막 부분, 형의 목숨을 먹고 산 아다치 선생의 이야기는 그만 나도 모르게 통곡하게 했다. 처연한 이야기였다. 형의 목숨을 먹고 산 사람이 어찌 비굴할 수 있겠는가. 아다치가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힘이었다.

역자의 말처럼 그의 작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는 향기가 있었다. 그 향기는 화려하거나 꾸민 것이 아니라 내면에 지니고 있어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그래서 오래도록 취하게 만드는 '인간의 향기'였다, 그 향기를 음미하며 지낼 수 있는 올 겨울은 내내 행복할 것이란 예감이 든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윤정주 그림,
양철북, 2008


#아이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4. 4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5. 5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