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수주, 그러나 오버 말고 예산교착 풀어야

[동향과 분석] 1995년 미국의 예산전쟁에 대한 오해와 진실, 그리고 교훈

등록 2009.12.28 16:06수정 2009.12.2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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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27일 오후(현지시간) 아부다비 힐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전 컨소시엄의 아랍에미리트 원전사업 수주를 밝히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7일 오후(현지시간) 아부다비 힐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전 컨소시엄의 아랍에미리트 원전사업 수주를 밝히고 있다.청와대

잘 된 일이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발주한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자로 한전 컨소시엄이 선정됐다. 보도에 따르면, 밀리던 분위기를 이명박(MB) 대통령이 나서서 뒤집은 것이라고 한다. 정치적 소득이 쏠쏠할 듯하다. 당장 4대강 예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예산전쟁(budget war)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들에겐 분명 선재(善哉), 굿잡(good job)이다.

클린턴의 예산전쟁이 주는 교훈

최근 가장 많이 거론되는 예산전쟁의 예가 클린턴과 미국 공화당이 격돌해 정부가 일부 문을 닫았던 것이다. 1995년~1996년 초의 일이다. 헌데 2009년 12월에 펼쳐지고 있는 우리의 예산전쟁과 관련해 여권이 이 케이스를 오해 또는 왜곡하고 있다. 그들이 말한다. '원칙을 지킨 대통령이 이겼다.' 그러나 사실(fact)은 말한다. '헛소리 마라.'

당시 예산전쟁의 핵심 쟁점은 균형예산(balanced budget)이었다. 막대한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세입과 세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이 쟁점은 199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하게 된 원동력인 '미국과의 계약'이란 공약 다발의 핵심이었다.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 즉 균형예산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깅그리치 하원의장과 공화당은 거세게 밀어붙였다.

클린턴이 위기탈출의 해결사로 고용한 딕 모리스는 균형예산 컨셉의 수용을 권했다. 그러나 백악관 내의 반대는 심했다. 클린턴도 내키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공화당이 말하는 균형예산이란 결국 재정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민주당이 지켜온 복지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론은 균형예산을 강하게 지지하니, 클린턴의 고민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클린턴은 고뇌 끝에 균형예산의 컨셉을 수용했다. 민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MB가 여론이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전격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클린턴의 예산전쟁이 말해주는 첫 번째 교훈이다. 야당이 주장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국민이 지지하는 것이면 설사 그것이 자신의 소신을 넘어 민주당의 오랜 정책 레짐(policy regime)을 수정하는 것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실용이고, 소위 '삼각주의'(triangulation) 전략의 핵심이다. 네 것 내 것을 떠나 국민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여권이 중도실용 기조의 진정성을 보이고, 예산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간단하다. 4대강 예산을 국민 뜻에 따라 양보하거나, 접으면 된다. 이 쉬운 교훈이 왜 그들에겐 안 보일까?


독주하면 망한다

 지난 2005년 2월24일,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자서전 <마이 라이프> 출판 기념회 모습.
지난 2005년 2월24일,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자서전 <마이 라이프> 출판 기념회 모습. 오마이뉴스 남소연

클린턴의 예산전쟁을 조금만 더 살펴보자. 1994년의 중간선거 패배로 클린턴은 링 밖으로 나가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식물대통령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일반적이 평가였다. 이런 판이니 공화당의 거침없는 기세는 당연한 것이었다. 가히 무소불위였다. 때문에 하원의장 깅그리치는 사실상 나라를 통치하는 수상(prime minister)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다수당이란 사실은 당시의 예산전쟁에서 중요한 요인이었다. 공화당이 의회 다수의 힘으로 클린턴과 행정부에게 항복을 요구한 끝에 마침내 초래된 것이 정부의 일부 잠정 폐쇄였다. 이것은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과 반대다.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의석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민주당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야권의 거부권(veto power)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미디어법 강행처리에서 보듯, 속절없이 밀렸다.

깅그리치의 공화당은 균형예산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복지 축소를 추진했다. 복지를 줄여 재정적자를 해소한다는 것이 기본방침이었다. 사실 그것은 30여 년 넘게 공화당에게 정치적 열세를 강요했던 뉴딜체제의 붕괴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균형예산에 찬성하는 여론도 복지예산의 축소에는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메디케이드(Medicaid)와 메디케어(Medicare), 교육, 환경 등에서의 예산삭감에 대해 여론은 강한 거부의사를 표출했다.

클린턴은 공화당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균형예산안을 수용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역사를 보면, 클린턴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재정흑자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화당의 균형예산 주장은 정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정적자의 규모를 늘린 것은 균형예산을 내건 레이건과 부시 정권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공화당은 타협을 거부했다. "혁명가는 타협하지 않는다." 깅그리치의 말이다. 그들은 클린턴의 완전한 백기투항을 요구했다. 클린턴이 균형예산 컨셉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것을 굴복의 사인으로 해석했다. 균형예산을 둘러싼 논쟁이 찬반구도에서 우열구도로 바뀌면서 여론이 달라지고 있는데도 전혀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똥고집'에 '마이웨이'(my way)만 외쳤다. 그 결과 정부가 문을 닫아야 했던 것이다. 

클린턴 예산전쟁의 두 번째 교훈은 힘의 우위를 앞세워 밀어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타협을 멀리한 채 독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공화당이 무시하자 이제는 국민들이 힘을 보여줬다. 그들은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을 재신임했다. 바로 얼마 전에 표를 몰아준 공화당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그렇게 공화당의 득세는 허망하게 무너졌고, 깅그리치는 몰락했다. 이게 민주정치의 문법이다.

모리스는 이것을 요트(sailboat)에 비교한다.

"여기서 저기까지 일직선으로 곧장 갈 수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누구에게도 '모터'는 없다. 예컨대, 감세나 다른 주요 사업을 그냥 명령하는 것이 끝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출발해 저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를 결합해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바람, 즉 여론은 내가 어디를 가라고 하는가?"

바람에 상관없이, 심지어 그 바람을 뚫고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몰고 갈 수 있는 힘이 모터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선 여론만이 그 힘을 가진 모터라는 것이다. 옳고, 옳고, 또 옳은 말이다. 대통령을 비롯해 선거에서 선출된 그 누구라도 여론을 무릅쓰고 밀어붙일 '모터'는 없다. 그럴 힘이 있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흔히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을 거론한다.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여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주장의 단골메뉴다. 한심한 논리다. 그때는 독재정권이었으나, 지금은 민주체제다. 게다가 피 흘려 얻은 민주주의 아니던가.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모른다면, 아니 차이가 없다고 본다면 제정신이 아니거나 뒤틀린 영혼이다. 물론 못 들은 척하겠지만, 이런 사람들에겐 그렇게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왜 비극적으로 무너졌는지 생각해 보길 권한다.

연휴 끝날 즈음에 들린 원전 수주 소식은 참 반가웠다. 기분 좋은 소식에 기꺼워 박수까지 쳤다. 그러나 적이 불안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안 그래도 마이동풍인데, 휴~ 이젠 기고만장까지…. 걱정이다. 심란해지던 참에 문득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노래 'Get a grip'이 생각났다. 곡은 감감한데, 제목의 뜻은 또렷하다. '정신 차려!'
#원전 수주 #MB #예산전쟁 #여론 #이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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