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지점장인 나, 이제 경비일을 해야 하나...

38년 직장생활 마감, 명예퇴직을 신청하다

등록 2009.12.30 12:32수정 2010.01.01 19:1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사무실의 내자리 이제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 ⓒ 조갑환


21일 명예퇴직 신청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53년생은 알게 모르게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명퇴 신청이다. 17일부터 신청이 있었는데 일찍 내기가 아쉬워서 계속 미루었다. 그러다가 월요일인 마지막 날에 결국 내고 말았다. 정말 내기가 싫었다. 38년 직장 생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내 젊음을 함께했던 직장생활을 마감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38년의 직장생활을 마감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했다. 사직서, 서약서, 무사고확인증에 내 직책과 이름으로 서명을 해서 제출했으며 사내통신망에 집주소를 입력하고 명퇴신청을 클릭 했더니 명퇴신청이 되었다는 것이다. 명퇴신청을 한 뒤 섭섭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했다. 38년 직장생활을 마감하는 것은 이리도 간단했다. 파란만장했던 직장생활에 비한다면 마지막은 너무나 간단했던 것이다. 

명퇴신청을 하고 난 후 발령을 기다리는 지금 명퇴 후 삶에 대해 걱정한다. 지금 생각하면 결혼은 빨리 하고 봐야 한다. 결혼을 빨리 하는 것도 노후를 잘 관리하는 것이다. 나는 33살에 결혼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아직까지 학생이다. 올 해 대학을 졸업하는 딸이 있고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아들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는 딸이 취업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딸이 취업을 못 한다고 서울에 있는 딸을 집으로 내려오라 할 수도 없다. 서울에 놔두어야 정보라도 빨라 취업을 바라볼 수가 있다.

아들 녀석은 이제야 대학을 간다. 아들 녀석은 제 아버지 명퇴한 것도 모르고 지방대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기어코 서울로만 가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서울로 간다면 아이들 교육비용이 현직에 있을 때보다 배는 더 들 것 같다.

명퇴 신청을 하고 재정지출을 정리했다. 모든 적금 불입을 중단했다. 모든 회비 자동이체도 중단했다. 고정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려고 분석을 했다. 그러나 고정비용은 별로 줄일 것이 없다. 고정비는 아파트관리비, 통신비, 공과금, 서울에 있는 딸애 방세, 생활비 등이다.

작년에 같은 금융기관에 근무하다가 명퇴한 친구가 나더러 한 말이 있다.


"명퇴한 뒤, 마음속으로 울었네. 명퇴하고 나니 핸폰 오는 것도 딱 끊어져 버리고 고독이란 놈이 맨 먼저 찾아오데. 자리라는 것이 남자의 자존심이데. 자네는 남은 기간 몇 개월을 몇 년으로 알고 잘 하고 나오소"

나 같이 부지런한 사람이 아무 할 일 없이 집에만 처박혀 있으면 병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아내가 아는 다문화가정 애들을 위한 대안학교가 있다. 아내는 그 곳에 자리라도 하나 만들어 놓고 매일 출근해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봉사활동을 하라고 한다.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러려고 마음먹었다.

그 학교 교무부장이라는 여자 분을 만나서 말을 들어보니 봉사활동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학교에 내가 할 만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소사직이라도 하겠습니다' 했더니 그 여자는 내가 할 일이 바로 그 일이라는 듯 경비원 및 소사일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 교무부장이라는 여자 분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현직에서는 지점장이라고 경비가 내 심부름을 다 해주었는데 이제는 내가 경비가 되어 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니 내 신세가 이렇게 처량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천한 일을 하며 봉사활동 할 바에는 오히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아내는 그런 나를 책망한다. 당신이 지금도 지점장이냐고 말이다. 이제는 과거 일은 다 잊고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집에 있는 것 보다야 그런 봉사활동이라도 하면서 매일 출근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오늘 방송과 신문을 보니 KT에서 5900여명이 명퇴를 한다. 그들 명퇴자의 평균 나이가 50.6세라니 너무 젊다. 한참 교육비가 많이 들어갈 나이들일 텐데 내일 같이 걱정이다. 기업에서는 희망퇴직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 아래 퇴직을 알게 모르게 강요한다. 그러나 명예퇴직이 우리 중년가장들의 어깨를 삶의 무게로 더욱 짓누른다. 그들의 걱정스런 얼굴들이 회색빛 겨울 하늘처럼 떠오른다.
#명예퇴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