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총리가 용산참사에 따옴표 붙인 까닭은?

용산참사 협상의 성과와 한계.... '반쪽 승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등록 2009.12.30 18:05수정 2009.12.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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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철거민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 남일당 건물 1층에 마련된 고 이상림, 고 양회성, 고 한대성, 고 이성수, 고 윤용헌씨 합동분향소 ⓒ 권우성

용산철거민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 남일당 건물 1층에 마련된 고 이상림, 고 양회성, 고 한대성, 고 이성수, 고 윤용헌씨 합동분향소 ⓒ 권우성

345일을 끌어온 용산 참사협상의 최대 쟁점은 '정부 사과'였다.

 

그동안 정부 측을 대표하는 총리실과 서울시는 유가족 보상에 대해서는 긍정적 입장을 밝히면서도 정부 사과나 세입자 임시·임대상가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해왔다. 양보 선례를 남기면 이후 개발 사업이나 공권력 행사 문제에서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유가족들을 대표하는 용산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는 정부 사과를 1순위 요구 사항으로 꼽았다. 유가족 보상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렸다. 자칫 "유가족들이 돈 더 받으려고 싸운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장 차로 좀처럼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용산 참사는 지난 11월 말부터 정부가 사과 문제에 전향적 태도를 밝히면서 협상의 물꼬를 텄다.

 

사과 아닌 '유감 표명', 용산참사 아닌 '용산 화재사건' 주장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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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시장이 30일 낮 12시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용산참사 협상 타결 기자회견을 마친뒤 종교계 자문위원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 김시연

오세훈 서울시장이 30일 낮 12시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용산참사 협상 타결 기자회견을 마친뒤 종교계 자문위원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 김시연

범대위에 따르면, 서울시는 당시 "우리가 매개가 되어 총리실 사과도 풀 수 있다"고 제안해왔다. 그리고 몇차례 접촉 끝에 약 2주 전부터 협상이 공식 재개됐다.

 

그러나 협상은 난항을 계속했다. 사과의 구체적 수위와 방법이 문제였다. 범대위 쪽 대표단이 결렬 선언을 하고 협상장을 박차고 나오는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정부 측은 사과가 아닌 '유감 표명'의 형식을 주장했고, 표현도 '용산참사'가 아닌 '용산 화재사건'으로 쓰겠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범대위는 "공권력 탄압에 대한 사과"를 주장했고 재개발 정책 개선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4일 전 정부 측이 연내 처리를 위해 '사과' 형식을 받아들이면서 협상은 급진전됐다. 범대위 활동가들은 30일 새벽까지 협상 수용 여부 등을 고심하다가 "이 정도 수준의 사과라면 장례를 치를 만한 최소한의 조건은 됐다"고 의견을 모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협상 타결 가능성은 반반이다"는 말이 나왔다.

 

양측은 합의가 끝난 뒤에도 정부의 최종 입장글 문안에 대한 막바지 조율을 계속했다.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정부가 입장글 내용을 전해왔고 범대위가 이를 받아들였다. 정운찬 총리의 입장글은 이같은 타협의 결과물이다.

 

이날 정운찬 총리는 "총리로서 책임을 느끼며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재개발정책에 대해서 "서민안정을 위해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보완해 나가겠다"고 언급했다. 이번 사건을 따옴표를 붙인 채 '용산 참사'라고 표현했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이라는 단서를 붙여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용산 범대위, '협상 결렬 시 1주기 장례'도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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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일 오전 용산 참사 현장을 찾은 정운찬 신임 국무총리가 유가족들과 면담을 마치고 나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이명익

지난 10월 3일 오전 용산 참사 현장을 찾은 정운찬 신임 국무총리가 유가족들과 면담을 마치고 나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이명익

그동안 용산참사는 몇 차례 협상 타결의 호기를 맞았다. 지난 8월 말에는 송영길 민주당 의원이 한승수 국무총리와 '4자협의'라는 구체적 협상 틀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그 뒤 정운찬 총리가 임명 직후 추석을 맞아 10월 3일 용산 남일당에서 고인들에게 분향을 하면서, 사태는 급진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정 총리는 "용산 문제는 사인 간의 일"이라는 입장으로 태도를 바꿨고, 구체적인 협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10월 말 고 이상림씨 아들인 이충연 용산4구역 철대위원장 등 구속된 철거민들이 최대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받으면서 분위기는 더욱 얼어붙었다.

 

약 2달간 정체됐던 용산협상은 서울시가 정부 사과 문제에 대한 의지를 보이면서 실마리를 찾았다. 범대위에 따르면, 서울시는 계속 조속한 협상을 주장했으며 "크리스마스 전에 처리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번에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용산 협상에 나선 것은 내년 지방자치선거를 염두에 둔 선택으로 읽힌다.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용산 참사는 재선을 위해서 반드시 털고 가야 할 숙제다. 반면, 서울시 주도로 '연내 처리'가 이뤄질 경우, 용산 참사가 일종의 성과로 남을 수도 있다.

 

범대위는 이번 협상에서 "당장 타결에 목매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마지노선을 참사 1주기(1월 20일)로 잡고, 그때까지 보다 많은 요구를 관철시킨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미 참사 11개월을 넘긴 상황에서 범대위 역시 카드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힘이 있을 때 협상을 타결해야 한다"는 위기감도 컸다.

 

1주기를 넘길 경우 사태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범대위는 협상이 결렬될 경우 참사 1주기에 자체적으로 장례를 치르는 방안도 심각하게 논의했다. 이 경우 준비기간을 거쳐 새로운 협상 및 장기투쟁 계획을 새롭게 짜야 하는 상황이었다.

 

2010년, 반쪽의 과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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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용산철거민참사 현장인 서울 한강로 남일당 빌딩의 가림막 사이로 재개발로 완성된 고층아파트가 불을 밝히고 있다. ⓒ 권우성

22일 오후 용산철거민참사 현장인 서울 한강로 남일당 빌딩의 가림막 사이로 재개발로 완성된 고층아파트가 불을 밝히고 있다. ⓒ 권우성

오는 1월 9일 장례와 참사 1주기를 전후로 용산 범대위 활동은 정리 국면으로 들어간다. 지난 3월 시작된 천주교의 촛불미사는 1월 6일을 끝으로 마무리되고, 명동성당에서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범대위 대표자들은 장례 이후 검찰에 자진출두할 예정이다.

 

범대위는 오는 1월 25일까지 남일당 건물(참사 현장, 분향소), 레아 촛불미디어센터(고 이상림씨 가게 건물, 범대위 등 단체 활동공간), 삼호복집(고 양회성씨 가게 건물, 유가족 생활공간)에서도 철수할 예정이다. 용산 4구역을 지키던 이 건물들이 철거되면 재개발사업이 본격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1년 동안 추락한 한국 인권의 현주소로 상징되던 용산 참사는 이렇게 2009년과 함께 일단락된다. 그러나 범대위는 '극적 협상타결'이라는 표현을 꺼리고 있다.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임시·임대상가 마련' 등의 요구는 타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쪽의 승리라는 것이다. 유가족들 역시 "공식 타결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서 눈물을 보였다.

 

실제로 이번 입장글에서 정운찬 총리는 제도적 보완을 언급하면서도 "지난 2월 정부가 재개발사업의 제도개선 대책을 내놓았다"고 강조했다. 이후 적극적 개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범대위는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뉴타운·재개발 정책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방식은 아직 고민 중이다. 박래군 위원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지난 1년을 평가하면서 "재개발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제기해야 한다"고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용산 유가족들이 11개월 동안 상복을 입고도 승리하지 못하고 남긴 반쪽은 2010년 시민사회의 과제로 남아있다.

2009.12.30 18:05 ⓒ 2009 OhmyNews
#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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