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돈! MB 잘해라 잉" 소리 없는 함성

2009년 마지막 날, 공원 배드민턴장 눈글

등록 2009.12.31 11:58수정 2009.12.31 11:5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연립주택 주차장 승용차 지붕 눈 위에 쓰여 있는 눈글 ⓒ 이승철


오늘이 12월 31일, 드디어 2009년 마지막 날이다. 여느 날처럼 일어나 바라본 창문 밖 풍경이 싸늘하다. 마주 바라보이는 공원언덕은 앙상한 잿빛 나무들 사이로 잔설이 새하얗다. 공원뿐만이 아니다. 15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눈 아래 산동네 단독주택 지붕들도 아직 새하얗기는 마찬가지다. 언덕과 아파트에 가린 응달이기 때문이리라.


서울 강북구 꿈의 숲 공원과 마을이 잇닿아 있는 절개지 절벽은 커다랗게 쭉쭉 뻗어 내린 고드름이 뒤덮여 있다. 엊그제 내린 눈이 한낮의 햇볕에 녹아 흘러내리다가 절벽에서 꽁꽁 얼어붙어 고드름이 된 것이다. 간단하게 아침 한술 뜨고 산책길에 나섰다. 추위에 대비하여 두툼한 외투를 걸쳤지만 품속으로 파고드는 한기가 송곳 끝처럼 뾰족하다.

공원으로 오르는 길옆 연립주택 마당에 눈을 새하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승용차 한 대는 며칠 동안 운행을 전혀 하지 않았나보다. 그런데 승용차 위에 쌓인 하얀 눈에 글씨 몇 자가 보인다. 다가가 살펴보니 ♡표시와 함께 '사랑해'라고 쓰여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가 살포시 피어오른다.

a

산동네 단독주택들 지붕위에 쌓인 눈이 아직도 하얗다 ⓒ 이승철


a

산동네와 공원 언덕을 잇는 절개지 절벽에 얼어붙은 커다란 고드름들 ⓒ 이승철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일까? 승용차 주인? 아니면 연립주택에 살고 있는 어느 묘령의 여인? 아니면 특정 대상 없이 그냥?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은 주인공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해마다 연말이면 지난 한해를 뒤돌아보며 '다사다난했던....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로 지난 1년을 마무리 하곤 한다. 그런데 지난해야말로 정말 다사다난한 한해였던 것 같다. 어제 미완의 결말이 난 용산참사는 무려 1년 가까이 기나긴 시간을 끌면서 유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던가.

2008년을 달구며 시청 앞 서울광장과 광화문 일대를 뒤덮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 이은 용산참사 촛불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서거와 장례식. 그리고 뒤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까지, 우리나라 근대사에 이렇게 큰일들이 한해에 일어났던 적이 있었던가?


a

언제 듣거나 읽어도 기분 좋은 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승철


a

얼마나 돈에 한이 맺혔으면... ⓒ 이승철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가는 마지막 날인데 날씨는 또 왜 이리 춥단 말인가. 그렇잖아도 견디기 힘든 삶에 미디어 법에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까지, 지난 한해를 보내며 이래저래 얼어붙은 국민들의 마음 탓일까? 2009년 마지막 날은 매서운 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배드민턴장은 하얀 눈이 덮인 채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칼바람 부는 추위에 누가 배드민턴을 칠까. 그런데 네트 밑에 눈글(눈에 쓴 글씨)들이 보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눈 위에 쓰여 있는 글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빙긋 웃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런데 또 있다.

'돈! 돈! 로또당첨' 그런데 이건 예사로운 글이 아니다. 그냥 로또당첨도 아니고 돈! 돈! 이라니, 얼마나 돈에 한이 맺혔으면 이런 글을 썼을까? 비정규직 노동자일까? 아니면 희망근로를 했던 사람일까? 하긴 요즘 돈에 한 맺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그 쓰라리고 깊은 한과 염원을 한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곧 스러져버릴 하얀 눈 위에라도 쏟아 놓아야 했으리라.

a

'MB 잘해라 잉' 격려? 충고? 소리없는 함성이며 절규? ⓒ 이승철


a

매서운 추위 속에 빈 의자들도 떨고 있다 ⓒ 이승철


어느새 양쪽 볼이 싸늘하다. 눈글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노출된 귓불이 시려온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언덕으로 오르다가 다시 눈 위에 쓴 글 하나를 더 만났다. 'MB잘해라잉' 이게 무슨 뜻일까? MB는 분명 이명박 대통령을 지칭하는 말일 테고. 그럼 격려 글인가? 그런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뭔가 못마땅해서 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MB잘해라잉'이라니 지금 잘못하고 있으니 잘하라고 쏘아붙이고 있는 말 같지 않은가? 허어 거참, 눈글치곤 상당히 당돌하다. 뭔가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보았댔자 역시 곧 스러져버릴 눈글이지만.

어쩌면 힘없는 민초가 하늘에 대고 주먹질 하듯 써본 글일 것이다. 어쩌겠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시위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니. 금방 스러져버릴 눈 위에 글씨 몇 자 쓰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는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글 속에는 분명 쓴 사람의 소리 없는 절규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근처에 있는 텅 빈 의자 네 개는 매서운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a

눈 위에 발자국을 찍어 그려낸 사랑마크 ⓒ 이승철


언덕 위에 오르자 바람 끝이 더욱 싸늘하고 매섭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인지 산책 나온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올라갔던 길이 아닌 옆길을 따라 내려왔다. 이 길에도 배드민턴장이 있었다. 이 배드민턴장에는 글씨는 보이지 않고 발자국을 찍어 그린 사랑마크 한 개만 남아 있었다.

역시 누구에게나 사랑이 제일 그립고 좋은가 보다. 그럴 것이다.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2009년이여, 잘 가라, 안녕! 오라! 2010년이여! 가난한 사람들, 돈에 한이 맺힌 사람들에게 돈도 듬뿍 안겨주는 넉넉한 새해로 어서 오라, 새해여! 무엇보다도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눈물 흘리지 않는 따뜻하고 훈훈한 사랑의 해로 성큼 오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12월 31일 #잘해라 잉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승철 #눈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 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