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몇 가지 사랑의 '이념형'(ideal type)이 있다. 아래의 이념형은 몇 가지 기준에 의해 편의상 구분한 것이다.
①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 역시 극복할 수 있다. 남녀 관계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이며,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결과, 상호간의 장벽은 허물어질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서로 닮아갈 것이다.
②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문화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고, 그 문화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가 아니라, '너는 너고 나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전제조건이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고 사랑의 유대를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③ 남성은 여성과는 다른 이성적이고 강한 존재이다.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성격이 다르다고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릇을 넓혀 사랑하는 사람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④ 사랑은 열정적이고 뜨거운 감정이다. 이것이 진정한 남녀 간의 사랑이며, 다른 것은 부차적이고 친근함과 익숙함이 빚어낸 감정일 뿐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사랑의 이념형은 다르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이념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랑할 수 있는 대상과 폭이 규정된다. 예컨대, ①과 ③은 ④로 시작할 수 있지만 쉽게 깨어질 수밖에 없으며, ②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④는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스스로 제한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사랑을 플라톤(plato)의 이데아(idea)처럼 사물 뒤에 감추어진 영원불변의 진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핏 보면 사랑할 때 느끼는 애틋함, 설레임, 그리움 등은 사랑을 규정짓는 보편적인 현상인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사랑의 존재형식은 그 사회의 문화와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된다. 누군가 자신에게 지금과 같은 감정이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인가.
'좁은문'에서 '알리샤'의 사랑이 그러했듯이 사랑의 욕구는 오로지 신만을 향한 것이어야 했을 수 도 있다. 아니면 미개 원시사회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악마의 유혹'으로 치부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같은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들조차 상호간에 품고 있는 사랑의 의미가 다르다. 그것은 플라토닉(platonic) 러브가 될 수가 있고 순전히 육체적인 감각과 쾌락에 그칠 수 도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구축되고 규정되는 하나의 '문화'이다.
사랑의 시작은 상호간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것
요컨대,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함에 있어 상호간의 사랑의 이념형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건망증, 감정적 태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 독특한 취향 등은 이념형 ⓛ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서로 조금씩 노력해서 개선해 나가야할 조건들이지만, 사랑은 곧 이념형 ③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러한 차이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져야 할 자신의 개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념형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연인들은 갈등과 불화를 단지 성격차이의 문제로 단정 짓고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이념형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지니고 있는 사랑의 이념형은 끊임없이 주변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해 간다. 열정적 사랑을 꿈꾸던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① 또는 ③ 과 같이 변화한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랑함에 있어 그 변화의 의미를 -사랑의 문화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현재의 이념형이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이해할 때, 우리는 좀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관용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토대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완벽한 사랑의 이념형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쾌락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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