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친국은 왕족이나 궁 안의 반역 사건에 상감이 친림해 추국하는 제도였으나 전흥문의 범궐 사건은 상감이 직접 나서기보다 도승지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의금부 도사가 죄인들을 구인한 후 상궐단자(上闕單字)를 홍국영에게 올리자 뒤이어 문랑의 목소리가 고함치듯 들려왔다. 이른바 문목(問目)이었다.
"흉악한 죄인 전흥문은 듣거라! 너는 누구의 사주를 받고 궁에 들어왔느냐! 사실대로 말하라!"
전흥문이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 약간은 때에 절은 듯한 옷. 피로한 기색, 몽롱한 시선을 허공에 띄우며 그는 주섬주섬 입을 열었다.
"나는 미친 왕이 중신들을 무차별로 죽인다기에 그것을 바로잡고자 궁에 들어왔소이다."
대사성이 큰 기침을 뿌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여기가 어느 곳이라고 함부로 주둥일 놀리느냐!"
그는 홍국영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뱉어냈다.
"이보시오 도승지. 저렇듯 흉악한 자의 말을 더 들어 무엇 하겠소. 범궐의 행위만으로 벌을 내릴 수 있는데 저 자의 흉악한 말을 더 들어야 하오? 문사낭청에게 문목이나 읽도록 하시지요!"
분위기를 살피며 홍국영의 메마른 목소리가 떨어졌다.
"문목을 읽어라!"
문사낭청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금반 전흥문의 범궐 사태는 나라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으로, 지난 임오년의 책략이 연계된 것이라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이 사건은 홍인한과 함께 노론 벽파의 대표격이었던 홍계희 집안에서 도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나경언에게 사도세자의 행적을 선대왕(영조)에게 과장되게 고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인물이다. 홍계희는 행인지 불행인지 신왕(정조)이 즉위하기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 가문은 사도세자의 아드님(정조)이 즉위한 것을 누구보다 불행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과 그 일당들은 상감을 시해코자 자객 50인을 궁에 투입했다. 전흥문은 천민 출신의 장사로 홍상범의 계략에 빠져 그의 여종 초희와 혼약했고, 얼마간의 자금으로 신접살림을 하며 모책을 감행하였다.
한편으로는 궁 안에 손을 넣어 궁성을 호위하는 호위군관 강용희를 포섭하였고, 뜻을 같이하는 20인의 무사까지 끌어들여 소수의 숙위병만이 상감을 지킬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전흥문과 강용희는 철편과 장검으로 무장한 채 궁 안을 어지럽혔으며, 여기에 강용희의 조카 별감 강계창과 궁중 나인 월혜를 안내자로 삼아 범궐했다. 이렇게 하여 지난 7월 2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경희궁 존현각(尊賢閣)에 이르렀으나 호위무사 김춘득에게 발각돼 모든 게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홍국영이 한 손을 들어 문목 낭송을 중단시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문사낭청을 향해 이 사건의 주도자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미 죄인들의 죄상은 만천하에 드러났소이다. 이 사건은 임오년에 하세하신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 있는 자들이 상감을 시해코자 모역한 것이 밝혀진 것이오. 홍상범을 비롯해 홍대섭과 그 자의 노비 최세복이 유배된 홍술해 등과 긴밀히 연락해 끔찍한 계획을 세웠소이다. 따라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나가면 이미 귀양가 있는 홍인한과 정후겸 등이 깊이 관여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모역(謀逆)과 관련 있는 자들은 극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오."
사약을 든 금부도사 일행은 죄인들이 위리 안치된 곳으로 말을 달렸다. 이미 의금부에 잡혀와 갖은 곤욕을 치른 죄인들이 층층시하로 물고가 나자 다음날은 은전군(恩全君)에 대한 치죄로 궁 안이 시끄러웠다. 은전군에게 죄를 묻기에 앞서 홍국영은 손수 정조에게 친국장에 나설 걸 청했다.
"전하, 친국은 죄인을 다스리는 것만이 아니라, 향후 이런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이유도 있나이다. 더욱이 은전군은 모역 사건의 중심부에 서 있는바 왕손인 그를 친국하는 건 나라의 중신들이 앞장서는 것보다 전하께서 직접 하문하심이 옳은 일이라 보옵니다."
전흥문을 비롯한 대역 죄인들이 형장으로 끌려 나간 후라 친국장은 은전군 이찬만이 무릎을 꿇린 채 사시나무 마냥 몸을 떨었다. 문사낭청이 은전군의 죄목을 읽어 내려갔다.
"은전군 이찬은 왕손으로서 대역죄인 홍문(洪門)과 결탁해 성상을 해치고 보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리하여···."
목소리가 뚝 그쳤다. 상감이 한 손을 들어 문목의 읽어 내림을 중지한 것이다. 상감이 직접 하문했다.
"은전군은 들으라."
"예에, 마마."
"네가 홍문과 결탁해 나를 내치고 보위에 오르려 했느냐?"
울상이 된 낯으로 은전군이 얼굴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오열이 터질 것 같은 눈에선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하, 신은 참으로 억울하옵니다. 신은 홍문의 어느 누구도 모르옵니다. 또한 그들이 어떤 일을 꾸민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없나이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상감은 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손으로 왕족들의 피를 왕궁에 뿌리는 일을 저지를까 두려워했었다. 그러므로 이복동생인 은전군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자 서둘러 친국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오나 마마···."
홍국영이 잔뜩 허리를 굽힌 채 목소리를 깔았다.
"은전군 나으리는 저들 홍문이 억지로 짜 맞춘 정황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보다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나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도승지?"
"저들 홍문의 주구인 월혜(月惠)는 문숙의 전각에서 일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나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치죄가 있어야 될 줄 믿나이다."
문숙의란 말에 상감의 용안이 긴장하는 빛이 엿보였다. 억울하게 하세하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문숙의. 폐서인으로 만들었지만 궁 안엔 그들의 잔존 세력이 꿈틀거렸다. 물론 상감으로서는 내키지 않았다. 선대왕인 영조 임금의 후궁이므로 서조모(庶祖母)다. 아무 짝에도 힘이 없는 노파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관계있다 하여 죄를 묻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죽이든 살리든 홍국영이 알아서 하면 좋으련만 굳이 자신이 나서 친국을 하라는 것에 원망하는 마음이 앞섰다.
친국을 벌이면 문숙의의 독설이 나올 것이고, 그리되면 또 한 차례 입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홍국영이 언제 준비했는지 오라에 묶인 문숙의가 끌려나왔다. 금부도사의 목소리가 좌중을 울렸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죄인이라···.'
상감은 금부도사의 말을 듣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했다.
"죄인 문숙의는 대답할지어다. 지난 임오년에 내 아버님 사도세자께서 세상을 뜨실 때, 죄인은 선왕을 충동질하고 모든 일을 날조해 아버님의 명한(命限)을 줄인 일이 있느냐?"
문숙의는 시선을 꼿꼿이 세운 채 상감을 노려보았다. 무언가 경멸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이자 상감은 부아가 치밀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 죄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 말에 대답하기 전···, 상감에게 일러둘 게 있소이다."
"일러두겠다? 무엇이오?"
"상감, 나는 서할머니요. 궁 안이 아니라 해도 나는 상감과 한 가족이오. 그런 내게 하속배들에게나 던지는 말투를 쓰는 건 나에게 모멸감을 주기보다 상감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임을 알아야 하오."
'가족?'
상감은 절로 모욕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가 가족이란 너울을 쓰고 있음을 일깨워 준 것이다. 상감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언성이 높아졌다.
"요망스럽구나! 감히 가족임을 빙자해! 하면 사도세자는 가족이 아니라 그토록 음해해 죽인 것이냐? 가족이 아니어 뒤주 속에 밀어 넣어 죽인 것이냐? 어허, 치가 떨리는 구나. 참으로 간악한 죄인이로다. 중죄를 짓고서도 감히 말대꾸 할 생각을 하다니!"
문숙의는 눈빛을 초승달같이 만들어 매섭게 상감을 쏘아보았다. 그녀 역시 이날의 친국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 것인가를 짐작하는 듯 했다.
"이보시오 상감. 나는 뒤주의 뒤 자도 아는 바 없소. 뒤주에 상감의 아비를 집어넣어 죽인 자는 여기 있는 문가가 아니라 잘난 이가(李哥)요. 바로 상감의 친조부 영조 대왕이란 말이오! 그러니 부친의 억울함을 설분하려거든 친조부인 선대왕을 관에서 끄집어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시오! 어찌하여 주모자는 놓아두고 죄 없는 날 닦달하는 거요!"
"닥쳐라! 아직도 그 잘난 세 치 혓바닥을 나불대느냐! 주모자 운운하면서 본인은 죄가 없는 양 몸을 빼는 건 세상천지 누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선대왕 마마께선 귀가 엷으셔서 너희 같은 간악한 자들의 속삭임에 잘도 농단 당하셨다. 모든 일을 꾸민 건 너희고 그 장난에 놀아난 것은 선대왕인데 그래도 죄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참으로 상감은 비겁하구려!"
"닥쳐라! 죄인은 비겁이란 말을 어떤 때 쓰는 것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냐!"
"상감, 나는 상감의 할머니요! 나를 닦달하는 건 패륜이오. 그런 언사를 쓰는 것은 패륜이라 그 말이오!"
"어허, 간교하구나.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사용하는가? 지난날 연산 임금은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관련자 모두를 징치하였다. 정귀인을 비롯해 임소용과 두 후궁을 손수 몽둥이로 때려죽인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교묘한 언사로 선대왕을 홀려 사지로 몰아넣고서 돼먹지 않은 말을 주절거리며 발뺌하고 있으니 따끔한 맛을 보아야 할 것이다!"
"오호호호, 상감. 연산이나 광해군 흉내를 내어 할머니에게 몽둥이찜질을 해 반정으로 보위에서 쫓겨나고 싶소? 자기 할머니를 두들겨 패 죽이는 것이 패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그게 패륜이 아니라면 이씨 임금들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모양이구려."
"뭐, 뭐라구?"
정조 임금은 보좌에서 일어나 뛰쳐 내려갈 형세였다. 조정의 문무대신들로부터 어떤 지탄을 받더라도 물고를 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정도였다. 금방 달려갈 것 같은 상감이 끄응 한숨을 몰아쉬며 한 호흡을 꿀꺽 삼켰다.
"하면···, 그 일은 그렇다 치자! 죄인이 궁안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하나, 하나씩 따져보면 그 모두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인으로 있는 월혜(月惠)는 죄인의 전각에 몸 담은 계집이 아니냐?"
"예전에야 그런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애들까지 내가 머무는 전각에 있었소. 허나, 내가 궁에서 쫓겨났으니 이전에 있던 아이가 누구누구인지 알 바 없고, 또한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아이가 나를 위해 일해 줄 리 없잖소. 괜히 생사람 잡지 마시오!"
"별감으로 있는 강계창도 죄인이 수하처럼 다룬 인물이고, 나인 월혜도 죄인의 사주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궁 안 소란이 모두 죄인과 관계있는데 아니라고 발뺌 하느냐?"
"오호호호, 상감. 나를 죽이려거든 빨리 칼을 뽑으시오. 다른 사람 손에 죽느니 제 아비를 죽인 철천지원수라 믿는 상감 손에 죽고 싶소. 그리해야 해묵은 은원이 막을 내리는 것 아니오?"
상감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여봐라, 나장! 단근질을 준비 하라!"
형리들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야 말로 속이 확 트이는 고문다운 고문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형리들이 손바람을 일으키며 형구를 차리자 그들의 머리 위로 상감의 노한 음성이 떨어졌다.
"저 요망한 죄인을 조금도 인정두지 말고 다루어라! 제 입으로 역모를 꾀하고 상감을 해하려 했다는 걸 고백할 때까지 살가죽과 뼈를 태워라! 형리들은 인정을 두지 말라!"
화가 치민 상감이 아찔한 명을 내리자 숙장문 앞은 살기로 가득 찼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든 형리의 행동을 저지시킨 건 홍국영이었다. 그는 상감 가까이 다가가 귀엣말로 아뢨다.
"전하, 신의 한 말씀만 들어주옵소서."
"무엇이오?"
"전하께선 결코 우(愚)를 범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라니요?"
"전하, 모든 것은 명명백백 드러났습니다. 별감 강계창과 나인 월혜가 무도한 홍문과 요망한 문숙의의 사주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죄인을 다스리는 일은 나랏법에 따라 엄히 치죄하면 될 것이니, 전하께선 이만 물러나시는 게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칫 하다간 역대 폭군들처럼 전하의 성덕에 금이 가는 일이 생기리라 보오니, 교살(絞殺)하라는 명을 내리시옵소서!"
"허나 방금 듣지 않았소. 저 요망한 것이 나를 기만하고 선대왕까지 농단하려 들지 않았소! 과인이 그런 모욕을 모른 척 넘겨야 옳겠소?"
"전하, 이것이야말로 문숙의가 노리는 일이옵니다. 문숙의는 살아날 길이 없자 전하를 충동시켜 살군(殺君)으로 만들 심산입니다. 문숙의가 발악하듯 한 말이니 전하께서 아니 들은 것으로 하십시오. 문숙의에게 직접 손을 대시면 장차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유념해 주시옵소서!"
그제야 임금은 정신이 들었다.
"알았소, 홍승지."
"전하, 참으로 영명한 결단이십니다. 전하께서 쌓아올린 적공(積功)의 탑이 더욱 튼실해졌음을 신은 의심치 않나이다."
형리들은 할 일없이 쇠꼬챙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불 속에 던져버렸다. 억센 나장의 손아귀에 끌려 나간 문숙의는 이날 오후 나인 월혜와 함께 교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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