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51) 흑백(黑白)

[우리 말에 마음쓰기 843] '남과 북'하고 '남(南)과 북(北)'

등록 2010.01.21 10:45수정 2010.01.2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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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남(南)과 북(北)

.. 이 공간을 관통하는 인천 지하철은 송도에서 인천시청을 지나 부평 너머 계양산까지 인천의 남(南)과 북(北)을 수직적으로 연결해 준다 ..  <작가들> 22호(2007년 가을) 309쪽


"이 공간(空間)을 관통(貫通)하는"은 "이곳을 꿰뚫는"이나 "이곳을 가로지르는"으로 손봅니다. "수직적(垂直的)으로 연결(連結)해"는 "수직으로 이어"나 "곧게 이어"로 손질합니다. '수직' 바로 앞에 '남과 북'이 있으니 '곧게'나 '똑바로'만 넣어도 잘 어울립니다.

조금만 더 살펴본다면 얼마든지 한결 손쉽게 적바림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 나라 글쟁이들한테 조금 더 살펴보며 글을 쓰기를 바라기는 어렵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을 사람을 헤아릴 노릇이요, 내 글월에 어떤 낱말을 넣으면서 이야기를 펼쳐야 좋을까를 곱씹을 노릇입니다.

글쓴이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글을 읽을 사람들은 고단합니다. 어려운 한자말이나 얄궂은 영어를 집어넣기 때문에만 고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한테 너무 낯선 토박이말을 끼워넣을 때에도 고단합니다. 제아무리 깨끔하면서 싱그러운 낱말이라 할지라도 국어사전 깊숙한 데에서 끄집어내어 툭툭 끼워넣으면 고개를 갸웃갸웃 아리송하게 바라볼밖에 없습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남과 북을 '남'과 '북'이라 적지 못하고 '남(南)'과 '북(北)'으로 적었습니다. 아무래도 읽는이를 살피지 않는 글쓴이 매무새 탓이라고 봅니다. '남과 북'으로 적지 않아야 할 까닭이 있었겠습니까. '남과 북'으로 적을 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더욱이 묶음표에 한자를 넣어 '남(南)과 북(北)'으로 적어 놓어야 한결 잘 알아본다고 할 수 있을는지요.

 ┌ 인천의 남(南)과 북(北)을
 │
 │→ 인천 남쪽과 북쪽을
 │→ 인천에서 남과 북을
 │→ 인천 위와 아래를
 └ …


남은 '남'이고 북은 '북'입니다. '동서남북'은 한자로 적지 않더라도 '동서남북'입니다. 남동이든 북서이든 동서이든 동북이든, 한글로 적으면 됩니다. 경기도와 강원도와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상도를 한자를 밝혀 적지 않아도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인천이며 춘천이며 부산이며 제주며 땅이름을 한자로 적어야 하겠습니까. 한글로 적으면 그만입니다.

우리들은 동서남북을 '왼쪽-오른쪽-아래쪽-위쪽'으로 가리키곤 합니다. 그래서 "동서를 잇는다"고 할 때에는 "왼쪽과 오른쪽을 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을 잇는다"고 할 때에는 "위와 아래를 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인천 위와 아래를 곧게 잇는다"처럼 손질해도 잘 어울립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과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나누려는 말이 달라집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글과 넋을 어떻게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주고받으려는 말이 새로워집니다. 마음을 쏟는 만큼 거듭나고, 마음을 바치는 만큼 튼튼해집니다.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아리따울 수 있고, 마음을 쓰는 만큼 훌륭할 수 있습니다.

ㄴ. 흑(黑)과 백(白)

.. 우리 세대는 국가권력에 의해 순식간에 세상이 뒤집혀, 어제까지는 '흑(黑)'이었던 것이 오늘은 간단히 '백(白)'으로 바뀌는 현실을 목도했습니다 ..  <데즈카 오사무/하연수 옮김-아톰의 슬픔>(문학동네,2009) 42쪽

"우리 세대(世代)는"은 "우리들은"이나 "우리 때에는"으로 다듬고, "국가권력(國家權力)에 의(依)해"는 "나라힘에 눌려"나 "나라힘에 내리눌려"로 다듬으며, '순식간(瞬息間)에'는 '하루아침에'나 '갑작스레'나 '난데없이'로 다듬습니다. '간단(簡單)히'는 '손쉽게'나 '가볍게'로 손보고, '현실(現實)'은 '모습'으로 손봅니다. '목도(目睹)했습니다'는 '지켜보았습니다'나 '보았습니다'나 '몸소 보았습니다'로 고쳐씁니다.

어찌 보면 이런저런 낱말을 굳이 다듬어야 할 까닭이 있느냐 따질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따질 만합니다. 그리고, 달리 보면 이런저런 낱말을 우리 스스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대충 써 왔다고 따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따질 만합니다.

이냥저냥 그대로 쓸 수 있는 낱말이며, 얼마든지 추스르고 다독이면서 새롭게 쓸 수 있는 낱말입니다. 그대로 가느냐 하고 새롭게 달라지느냐는 우리한테 달린 일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거듭나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늘 쓰는 말부터 새로울 수 있도록 힘써야 하며, 우리가 나날이 아름다워지기를 꿈꾼다면 우리가 노상 쓰는 글부터 아름다울 수 있게끔 애써야 합니다.

 ┌ 흑(黑)
 │  (1) = 검은색
 │  (2) = 흑지
 │   - 흑을 잡다 / 중앙의 흑이 집을 못 내고 죽게 생겼다
 ├ 백(白)
 │  (1) = 흰색
 │  (2) = 백지(白子)
 │   - 백을 쥐고 바둑을 두다
 │
 ├ '흑(黑)'이었던 것이
 │→ 검었던 것이
 │→ 검다고 하다가
 │→ 검다고 이야기하다가
 └ …

바둑을 두거나 오목을 둘 때면, 우리들은 '흑'과 '백'으로 나뉜 알을 집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나는 흑을 해야지"나 "자네가 백을 놓게" 하고 말합니다. "내가 흰알을 두어야지"나 "네가 검은알을 놓아"처럼 말하는 일은 퍽 드뭅니다. 바둑알을 만드는 사람과 바둑알을 다루는 사람과 바둑알을 쓰는 사람이 똑같습니다. 모두들 '흑백'이라는 생각만 합니다.

 ┌ 어제까지는 검었던 것이 오늘은 손쉽게 하얀 것으로 바뀌는
 ├ 어제까지는 검다고 하다가 오늘은 가볍게 하얗다고 하는
 ├ 어제까지는 검은빛으로 다루다가 오늘은 갑작스레 하얀빛으로 다루는
 └ …

살결이 검은 사람은 말 그대로 '검은사람'이나 '검은이'입니다. 또는 '검둥이'입니다. 살결이 하얀 사람은 이 모습 그대로 '하얀사람'이나 '하얀이'입니다. 또는 '흰둥이'입니다. 그렇지만, '검은이'나 '하얀이' 같은 말마디를 쓰는 일은 없고, '검둥이'와 '흰둥이'는 깎아내리는 말마디로 느끼고 있습니다. 꾸밈없이 가리키던 말마디가 꾸밈있이 가리키는 낱말로 뒤바뀌는 셈이고, 우리가 바라보는 그대로 말하던 매무새가 어느덧 스러지거나 뜻을 잃는 셈입니다.

삶매무새를 자꾸자꾸 꾸미거나 덧바르거나 껍데기를 씌우는 가운데, 우리 생각매무새까지 꾸미고 덧바르고 껍데기를 씌우는 흐름으로 옮아갑니다. 이러면서 우리 말과 글 또한 꾸밈없이 다루기보다 꾸미며 다루고, 덧바르고, 껍데기를 씌워야 제 멋과 맛이 난다고 느낍니다.

제자리를 잃는 삶이기에 제자리를 잃는 생각입니다. 제자리를 잃는 생각을 다스리지 않으니 제자리를 잃는 말글이지만 느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길을 놓치다 못해 제 눈을 놓치고, 제 느낌을 놓치며 제 말투며 넋이며 고스란히 놓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한자 #묶음표 한자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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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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