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를 견뎌온 은둔지, '에르미타'

[에르미타 익스프레스-Intro] '밀리언 스타스(Million Stars) 호텔'에 탑승하다

등록 2010.01.25 16:06수정 2010.01.2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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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를 위해 마련된 밀리언 스타스 호텔(Million Stars Hotel).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를 위해 마련된 밀리언 스타스 호텔(Million Stars Hotel). ⓒ 지은경


"나의 에르미타(ermita) 익스프레스를 소개할게."

지난 2007년, 그는 노란색 르노 승합차의 사이드미러를 가볍게 토닥거리며 내게 말했다. 승합차의 조수석에 올라타자 약초를 연상시키는 듯한 냄새가 콧속으로 솔솔 흘러들어왔다. 룸미러에 걸려 있는 말린 풀 한 더미가 발산하는 냄새였다.


매년 겨울, '에르미타 프로젝트'를 위해 스페인에 방문할 때마다 숲 속에서 향기로운 풀들을 얻는다고 했다. 말린 풀 외에도 각종 물건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지만 그들은 나름의 이유와 형태들대로 정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차 안은 온갖 고생을 겪은 이야기들의 흔적투성이었다. 그것이 전혀 고급스럽지 않은 그의 승합차와의 처음 만남이었다.

에르미타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a  에르미타(ermita).

에르미타(ermita). ⓒ 세바스티안


2010년 1월, 에르미타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는 매해 겨울이 마지막이기를 소망했지만, 올해로 에르미타의 겨울은 7년을 맞는다. 그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윽한 햇빛이 바람에 실려 오면 세상은 몇 분간, 혹은 몇 초간 그림자 없는 영롱함 자체가 된다는 것을 그가 알려 주었다.

"이것이 바로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야!"라며 그는 어린 아이처럼 금세 떠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었다.

a  에르미타(ermita).

에르미타(ermita). ⓒ 세바스티안


'에르미타'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출발하는 거의 모든 언어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을 수 있는데, 라틴어가 아닌 언어에서도 비슷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이라는 외롭고도 쓸쓸한 인상의 의미를 간직한 곳, 종교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신자들이나 세상을 등지고자 했던 사람들, 혹은 여행자들이 바람과 추위를 피해 잠시 머물며 다음 여정을 마음에 새기던 곳을 일컫는 말이다.


로마네스크 시대는 라틴어에 배경을 둔 에레무스(eremus)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리스어에서도 비슷한 뜻의 에레모스(eremos)를 찾을 수 있다. 이 단어들은 히브리언어인 테만(teman)과 산스크리트어인 아슈람(ashram)과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 모든 단어들이 황량한, 사막화된, 퇴직한, 혹은 종교적인 참선의 장소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에르미타들은 보통 종교적인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그 외 종교와는 관계가 먼 여행자들에 의해서, 혹은 세상을 등지려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에르미타 등도 찾을 수 있다.


우울한 회색빛 감도는 겨울날만 여행하는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a  에르미타(ermita).

에르미타(ermita). ⓒ 세바스티안


a  에르미타(ermita).

에르미타(ermita). ⓒ 세바스티안


세바스티안(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은 그동안 로마네스크와 그 이전의 건축 형태를 띤 에르미타만을 찾아 스페인 북부의 산맥들을 이리저리 횡단하고 넘나들었다.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불리는 건축물들의 흔적들은 711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특히 8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이슬람 세력의 영향을 받은 유럽문화, 그중에서도 스페인에 남은 모자라빅(Mozarabic) 양식은 이슬람 문화와 공존하던 유럽 기독교 문화의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이들의 문화와 건축물들은 소박하고 작은 규모로 탄생하여 스페인의 시골구석에서 버려지고 잊힌 채로 8세기가 넘는 시간을 견뎌냈다. 이들은 도적들에 의해, 혹은 무심한 사람들이 범하는 기물 파손들에 의해 손상되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

세바스티안은 이 소박한 건축물들을 자신의 거울을 삼아 찾아다니는 듯했다. 그는 이들을 가난함을 상징하는 교회로 이름 짓고 감추어진 작은 진주들을 하나씩 찾아내듯 흔적을 따라 여행을 한다. 화려하고 발랄한 파란 하늘은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 아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우울한 회색 빛이 감도는 겨울날만을 여행하는데, 이 특별한 빛은 주변을 고요히 잠재우고 구름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에르미타들은 영롱하고 섬세하게 반짝거린다.

고요한 빛을 부드럽게 담아내는 핀홀 카메라는 가장 원시적인 사진기로 몽롱한 콘트라스트를 자아내지만 에르미타의 외로움이 가진 모든 디테일들을 정성스럽게 담아내는 재주를 지녔다. 나무 상자로 만들어진 원시적인 카메라는 빈자의 교회를 위한 빈자의 카메라가 가진 의미를 전달하는 데 손색이 없다.

(올겨울은 이 외롭고 묵직한 사연들을 지닌 건축물들을 찾아나서는 작업에 동참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a  에르미타(ermita).

에르미타(ermita). ⓒ 세바스티안


a  에르미타(ermita).

에르미타(ermita). ⓒ 세바스티안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기사에 쓰인 사진은 사진작가 세바스티안이 핀홀 카메라로 찍은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기사에 쓰인 사진은 사진작가 세바스티안이 핀홀 카메라로 찍은 것입니다.
#에르미타 #스페인 #핀홀 카메라 #세바스티안 #밀리언 스타스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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