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m나 되는 혈액 고형체가 코에서 나왔어요"

카네미유 다이옥신 중독 사건 피해자의 나가사키 대집회 참가기

등록 2010.01.28 17:23수정 2010.01.2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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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봄빛을 품고 겨울 속으로 뛰어들어온 소년 마냥 나가사키의 날씨는 상큼하고 따뜻했다. 오전에는 지난 1월 1일부터 '핵무기 폐절'의 염원을 담아 오키나와에서 출발해 도쿄로 향하는 평화의 도보순례단 '피스 워크'팀이 마침 나가사키 시내를 지나는 날이라, 그 걸음에 내 걸음도 보태었다.

피스 워크 팀이 시내 번화가 중 하나인 스미요시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멈췄을 때, 나는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원폭자료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전에 이미 원폭자료관 아래 폭심지 공원에서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추모의 모임을 한 뒤였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원폭자료관으로 돌아간 것은, 이날 오후 2시부터 홀에서 열리기로 된 '카네미유 증(カネミ油症) 피해자 구제를 요구하는 나가사키 대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전부터 기업이 일으키는 공해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식품공해 사건으로 꼽히는 카네미 식용유 사건에 대해 책을 통해 접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장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 기대를 품고 현장을 찾았다.

1968년 일본에서 대체 무슨 일이?

a  카네미 식용유의 다이옥신 피해자 및 시민운동가들이 함께 했던 나가사키 대집회. 우측의 3인이 웨슬레얀대 학생. 좌측에서 앞은 시민운동가 후지와라씨, 뒤쪽이 자신의 체험을 증언하기 위하여 무대에 오른 피해자 여성.

카네미 식용유의 다이옥신 피해자 및 시민운동가들이 함께 했던 나가사키 대집회. 우측의 3인이 웨슬레얀대 학생. 좌측에서 앞은 시민운동가 후지와라씨, 뒤쪽이 자신의 체험을 증언하기 위하여 무대에 오른 피해자 여성. ⓒ 전은옥


피해자가 키타큐슈와 고토시를 중심으로 후쿠오카와 나가사키 등 서일본 지대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참석자들도 다양한 곳으로부터 나가사키를 찾아왔다. 후쿠오카현과 나가사키현 물론이고, 도쿄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피해자 지원운동을 펼쳐온 변호단과 시민운동가들, 연구자들이 함께했다.

이날 모임은 나가사키현 웨슬레얀대학 학생들과 피해자간의 대화, 피해자의 호소, 참가자의 연대 메시지, 피폭자와 변호단의 활동 경과 보고 등의 순서로 이어졌다. 장내 한 켠에는 1968년 당시 카네미 식용유를 먹고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건강피해 사례를 전시했다. 손톱이 갈라진 사람, 눈과 뼈 등에 문제가 생긴 사람, 피부 질환, 검은 피부로 출생한 태아 등의 사진과 함께 피해자들이 정부나 기업과 싸우는 장면이 담긴 사진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모임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사회자는 매우 신중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참석자들과 보도진들에게 "피해자의 얼굴은 촬영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피해자의 프라이버시 침해로 인한 이중 피해를 막기 위해 대단히 노력했다. 동시에 피해자의 얼굴 촬영을 제외하고는 "전부 보도해주십시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카네미유 증 피해 사건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무대에서 웨슬레얀 대학의 학생들과 대화에 나선 피해자는 시모다씨였다. 그녀는 자신이 초등학생이었던 1968년을 떠올리며, "여러분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지만, 1968년이 어떤 해였는가 하면, 사세보에 (미 해군의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입항했고,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던 해이고, 도쿄에서는 3억엔 사건(현금을 수송하던 은행의 차량이 경찰로 위장한 괴한에 의해 3억엔에 가까운 현금을 도난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라며, 참석자들 모두가 사건 발생 당시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마음을 옮겨갈 수 있도록 차분하게 술회하기 시작했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났고 이 젊은이들의 혁명의 기운은 전유럽과 미국, 일본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김신조가 청와대에 침투하고자 한 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국가의 안보와 간첩 수색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 전신을 강타한 다이옥신

같은 해, 일본에서는 인간이 최초로 맹독성 다이옥신을 식품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먹는' 사건이 발생한다. 카네미 라이스 오일이라는 식용유 제조과정에 다이옥신이 섞여 들어가면서 그것이 사람의 입으로 유입된 것이다. 시모다씨 가정에서도 어머니가 카네미 라이스 오일로 날마다 요리를 해서 온 가족이 식사를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그해 나는 자주 대량의 코피를 쏟아냈어요. 일주일 내내 코피를 흘린 적도 있지요. 불안했습니다. 고학년이 된 후에는 자주 코피를 흘렸는데, 어느날은 6시간 동안 피가 멈추질 않았어요. 병원에서 확인해보니 4m나 되는 혈액의 고형체가 로프처럼 줄줄이 뽑아져 나왔어요."

그녀는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학교에 가는 것이 언제나 괴로웠고, "왜, 나만…"이라는 억울함을 많이 느꼈다. 물론 당시에는 자신이 아픈 까닭이 식용유 때문이란 것을 알지 못했고, 만족할 만한 치료도 받을 수 없었다.

카네미 라이스 오일을 먹고 건강상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이들은 타 환자와 비교할 때 같은 천식이라도, 카네미유증 환자에게서만 나타나는 유형의 천식을 앓았고, 다종다양한 병의 치료법은 아직도 확실하게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시모다씨는 "치료법을 찾아주면 좋겠어요"라고 애달프게 말했다.

시모다씨는 피해가 발생하기 8개월 전에 이미 같은 회사가 제조· 판매한 기름을 섭취한 닭들이 집단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더 조사하고 인간에의 영향과 피해를 막았어야 하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서 "우리의 건강을 방치한 건 인권침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같은 식용유를 먹고, 같은 질병을 앓는, 같은 피해자인데 가족 중에서 어머니와 남동생, 본인은 피해자로 '인정'받고, 아버지와 여동생은 '미인정'환자로 남는 것은 이상하다며, 국가가 만든 카네미유 증 인정기준의 부당함을 성토했다.

또 자녀 세대에 나타나는 건강문제에 대해서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실태조사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이날 모임은 카네미 식용유로 인한 모든 피해자를 구제하는 법률 제정을 촉구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참석한 피해자들이 모두 법적 제도 마련을 촉구했다. 정권이 바뀐 것에 대한 기대와 대학생들의 관심과 연대에도 힘을 얻은 눈빛이었다.

식품공해 반복, 피해자 만들지 않는 사회 구조 만들기가 중요

a  집회가 열린 원폭자료관 홀에 전시된 다이옥신 피해자들의 사진. 카네미유증 사건은 기업의 잘못으로 인해 인류가 처음으로 다이옥신을 음식을 통해 장기간 섭취한 사건이다.

집회가 열린 원폭자료관 홀에 전시된 다이옥신 피해자들의 사진. 카네미유증 사건은 기업의 잘못으로 인해 인류가 처음으로 다이옥신을 음식을 통해 장기간 섭취한 사건이다. ⓒ 전은옥


도쿄에서 카네미유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한 지원활동을 해온 후지와라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피해의 전체상이 명쾌히 파악되고 있지 않다. 카네미유 사건은 인권의 문제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인데도 병으로 인하여 사회적 차별을 당하고 살아와야 했다. 지금까지 도쿄, 키타큐슈, 히로시마, 오사카, 고치, 고토, 후쿠오카 등에서 집회를 개최하며 후생노동성이나 농림성에도 촉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일본에는 아직도 식품공해가 반복되고 있는데, 카네미유 사건은 피해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 문제다. 더이상 피해자를 낳지 않는 사회 만들기가 중요하다."

사회를 맡은 오오쿠보 사다토시씨도 개회사를 통해 이 집회가 "20여년 만의 대집회"라면서, "카네미유 증 피해자의 문제해결 없이는 일본의 전후(戰後)는 끝나지 않는다"라고 일본사회에서 카네미 식용유 사건이 갖는 의미를 되새겼다.

패전 후 미군정을 거쳐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줄곧 자민당 독주 체제를 이어 오다가, 작년 8월 총선을 통하여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54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정권교체와 함께 일본 사회 각지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서민들의 눈물과 땀으로 경제대국화하였으나, 90년대 이후 줄곧 침체와 붕괴, 균열을 맞이하고 있는 일본.

사람에게 따뜻한 사회보다는 개발과 경쟁에 몰두했던 냉혹했던 자민당 독주 체제가 끝나자, 고통받아온 소수자들의 목소리, 차별받아온 평화주의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변화에 대한 바람, 하토야마 총리의 말처럼 '사회적 약자'가 더 존중받고 '우애'로 서로 연결되는 인간에게 따뜻한 사회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42년 전 발생한 엄청난 식품공해 사건의 피해자들은 세대를 이어 발생하는 고통 속에 신음하며,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마음대로 만든 '식용유 피해자 인정 기준'에 의해 피해자들을 인정/미인정 피해자로 분열시키지 말고 전 피해자를 대상으로 명확한 실태조사를 실시하라 ▲카네미유 증의 검진과 연구사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병증의 해명 및 치료법 개발을 강화하라 ▲의료비의 자기부담분을 공적부담으로 하고, 건강관리 수당 지급 등 의료· 생활 측면의 지원을 실시하라 ▲피해자 구제를 위한 법률을 제정하라 등등.

카네미 식용유 피해자들의 길고 험난한 이 싸움이 결코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먹을거리의 안전 문제는 이제 글로벌한 사회 문제다. 먹거리로 인한 피해는 1세대에 머무르지 않고 최소한 3세대까지 이어진다는 연구결과도 보고된 적이 있다. 우리의 식탁은 지금 '식품 테러'로부터 안전한가.

'카네미유 증 사건'이란?


'카네미유 증 사건'이란?

1968년 카네미 창고 주식회사가 제조·판매한 식용유를 먹은 나가사키현과 후쿠오카현 키타큐슈 일대의 소비자들이 식용유의 제조과정(탈취공정)에서 섞여들어간 합성화학물질(PCB, PCDF 등의 다이옥신류)을 섭취하게 되어 일어난 전대미문의 식품공해(중독)사건. 한 마디로 정의하면 다이옥신 식용유 사건이라고도 바꿔 부를 수 있다. 카네미 창고가 판매한 '카네미 라이스 오일'로 인한 피해는 그 피해발생 지역이 서일본 일대 전역에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연말까지 보건소에 신고접수한 피해자 수는 약 14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국가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피해자 구제를 위한 어떠한 법도 제정하고 있지 않다. 또 피해자 중 체내 다이옥신 농도만을 기준으로 하여 피해자로서 인정하거나 미인정하는 상황이어서, 미인정 환자의 경우 어떠한 의료비, 생계지원도 없이 극도의 고통 속에 방치되고 있다. 현재 국가가 '인정'한 환자는 1927명뿐이다. 총 피해자 수의 1할에 불과한 수치다. 피해자들은 식품성취 당시 일시적인 건강피해를 겪은 것이 아니라,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종다양하며 심각한 수준의 병마와 싸우고 있다.

'카네미유 증' 사건 경과
1968년 2월
쌀겨기름 제조 과정의 부산물인 검은 기름(제조업자: 키타큐슈(주)카네미창고)을 사용한 사료를 먹은 닭의 대량폐사(추정 190~210만 마리)

1968년 3월
농수성, 닭의 폐사 원인은 배합사료에 있음을 특정함.

1968년 10월
키타큐슈 일원을 중심으로 한 서일본지방에서, 카네미유 창고가 제조한 쌀겨기름에 의해 식중독사건이 발생.

1969년 11월
중독의 원인이 쌀겨기름에 혼입된 PCB(제조자:카네가후지 화학공업, 현 카네카 주식회사)임이 판명. (후생성 조사)

1970년 11월
카네미유 증 피해자는, 국가와 카네미창고, 카네카 회사를 상대로, 5그룹의 나뉘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원고총수 1290명)

1977년
원인물질인 쌀겨 기름에 PCB뿐 아니라, PCDF(다이옥신류)가 존재하는 것을 유증(식용유관련질환)연구반(규슈대학)이 최초 인정.

1984년 3월 1985년 2월
제1진 후쿠오카고등재판소 판결과 제3진 후쿠오카 지방재판소 고쿠라 지부판결에서, 피해자가 카네카 회사와 국가에 승소. 이 판결에 기초하여 카네카 회사와 국가의 가집행이 있었음(가불금). 국가로부터의 가불금은 829명, 총액 약 27억엔, 1인당 약 320만엔.

1987년 3월
제2진 후쿠오카 최고재판소 판결에서, 국가와 카네카 회사의 책임이 부정됨에 따라, 최고재판소의 권고에 의한 원고측과 카네카 회사 측의 화해가 성립, 국가에 대한 소송은 취하. (가불금반환문제가 발생)

1988년
환경성이 PCDF를 다이옥신 종류로 분류. (독성은, PCB의 5000배)

1998년 10월
계간 「地球の一と」 발간.
『카네미유 증의 피해자들은 지금』(아카시 쇼지로 저) 게재.

1999년 9월
'멈추자! 다이옥신오염· 관동네트워크' 회원들이, 카네미 피해자와 함께
베네치아에서 개최된 '99국제다이옥신회의에 참가.

2000년 3월
하라다 마사즈미 구마모토 학원 대학교수 등이 고토시 타마노우라쵸에서 자주 검진.

2001년 12월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사카구치 치카라 후생노동대신이 카네미유증의 원인은 다이옥신이 주원인이라고 인정, 대책 재검토를 언급.

2002년 3월
중의원 예산분과회에서 사카구치 후생노동대신이 진단기준 재검토, 인정기준 재검토, 산부인과의에 의한 검진 추가를 표명.

2002년 6월
카네미유 증 피해자지원센터(동경) 설립.

2002년
유증 진단 기준 재평가 위원회를 설치(역학 전문가를 2명 추가)치료연구반의 체제를 강화, 산부인과의나 암 연구가 등 추가전국 검진에서 PCDF의 혈중농도측정을 개시(수검자는 3할 증가)

2003년 3월
카네미유증 문제관계 부처 관련회의(후생노동, 농수산, 환경) 설치.

2004년 4월
피해자 517명이 일본변호사연합회에 대해서 인권구제 신청.

2004년 9월
PCDF를 근거로 한 새로운 진단기준을 작성.

2004년 12월
5현 18명, 새롭게 카네미유 증 인정환자로서 인정.

2006년 4월
일본변호사연합회는, 피해자가 인권침해를 받고 있다고 인정해, 국가와 카네미창고에 대해 '권고'를, 카네카 회사에 대해서는 '요망'의 결정을 발표.

2007년 6월
가불금 특례조치법안 성립. 가불금 반환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해결.

2008년 3월
국가에 의한 '건강실태조사' (생존인정피해자 약 13000여 명) 실시.

2008년 5월
신 인정피해자 (48명) 카네미창고에 대해서 손해배상청고 소송을 제기.

2009년 11월
피해자의 영구 구제를 요청하는 요청서를 후생노동대신에 제출.

(출처: 카네미유 증 피해자의 구제를 요구하는 나가사키 대집회 실행위원회, 2010.1.24.)
#식품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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