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고상.경북 왜관읍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박태신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길, '침묵'그러다 최근 계기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상영관이 뜸해 일부러 멀리 찾아가 본 영화 <위대한 침묵>과 관련된 신문 칼럼을 본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 칼럼은 <워낭소리>도 언급했습니다(서울신문, 2010. 1. 21일자 '문화마당' 참고). 그 칼럼의 필자는 <위대한 침묵>에서 침묵의 존재 당위성을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없음의 존재'인 인간이 '있음의 존재(神)'와 소통할" 길로 설명했습니다. <워낭소리>를 통해서는 '느림'의 가치를 찾았습니다. "'있음의 존재'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느림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에게도 세 시간 가까운, 대사가 거의 없는 침묵의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더랬습니다. 자급자족의 노동을 하고 공동 종교예절을 지켜나가면서, 나머지 시간은 신과 대화하고 묵상하고 고뇌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종말이 와도 저 곳에는 오지 않았으면, 아니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침묵과 절제와 느림의 삶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에 종말이 와도 허둥대지 않을 것이고, 종말이 딱히 겁날 대상이 아닐 것 같기 때문입니다.
왠지 저라도 손님으로 그 곳 구석진 방 하나 얻어 한참을 머물다가 그런 와중에, 스피드 시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물적 서비스와 지적인 정보를 왕창 놓치더라도 그리 억울할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모은 돈과 절약해 놓은 시간을 통해 얻고자 하는 안식을 이곳의 수도사들은 굳이 돈을 모으고 시간을 절약하지 않더라도 바로 자신들이 선 자리에서 무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참을 에둘러 가서도 결국은 잘 찾아내지 못하는 평온을 그들은 침묵과 느림으로써 쉽게 찾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도시인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정적(침묵), 느림(뒤처짐), 아무것도 하지 않기, 무소유 이런 것들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노트북을 두들기는 저 또한 그렇습니다. 펜으로 써내려가는 미덕을 많이 상실한 것도 그런 모습의 하나이겠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침묵> 중에는 한 수도사가 필기체로 천천히 펜글씨를 써내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음이 없는 글쓰기 말입니다. 부산의 강은교 시인은 시작(詩作)할 때, '컴퓨터로 인해 잃어버린 말의 긴장도를 시험하기 위해' 1차적으로 연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