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는 누가 울리라고

재일동포 정화수 시인을 추모하며

등록 2010.02.02 13:13수정 2010.02.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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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협을 건너서

 

입춘을 앞둔 이즈음 대한해협을 건너 '종소리' 제41호가 내 집까지 울렸다.  2000년 재일 조선 시인들이 계간지F로 만든 종소리는 단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남과 북의 조국을 향해 고고한 소리를 울렸다.

 

세계에 어느 민족이건 해외에 나가 대를 이어 살게 되면 아무래도 그 민족성은 바래지고 희박해지기 마련이지만 재일동포들의 경우는 그 사정이 너무나 판이하고 절실하다.

 

혹독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다름 아닌 종주국으로 끌려 온 재일동포들은 황민화정책에 따라 말과 이름마저 빼앗겼다. 그뿐 아니라, 그 일제와의 연유로 하여 대를 이어 봉쇄된 채 근 한 세기에 걸쳐 의연히 민족적 차별과 멸시 등 온갖 탄압을 받고 있다. 계속 함정과 같은 교묘한 동화정책에 따라 민족 허무주의에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치마저고리에 칼이 날아드는 시기를 같이하여 학생도 학교도 계속 줄어들고 숱한 우리 후대들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일본의 퇴폐문화와 그 말속에 포위되어 민족적 주체를 세우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말이 곧 민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민족의 말과 더불어 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지키는데 그 선도성을 발휘해야 할 민족문학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 가운데에도 시대를 앞질러 가는 시문학은 앞장에 서야 하지 않겠는가.

 

재일동포 고 정화수 시인  대동강을 배경으로(2005. 여름)
재일동포 고 정화수 시인 대동강을 배경으로(2005. 여름)박도
▲ 재일동포 고 정화수 시인 대동강을 배경으로(2005. 여름) ⓒ 박도

위 글은 2004년 11월 20일에 발간한 <종소리 시인집> 에 종소리 시인회 정화수 대표의 '책머리에' 글 일부다.

 

정화수 시인은 1935년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뒤, 조선대학교 어문학부 노문과를 졸업하였다. 도쿄조선학교 중등부 교원, <조선신보사> 기자, 부국장, 문예동 위원장 고문 등을 역임했다.

 

 2003년부터 시지 <종소리> 대표로 재일동포 문단을 이끌다가 지난겨울에 운명하셨다. 시집으로는 <영원한 사랑 조국의 품이여> 외 다수가 있다. 

 

나는 재일 종소리 시인 회원들과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 이틀째 되는 날 대동강 강가에서 인사를 나눴는데, 그 뒤 매회 <종소리> 시지를 받아보고 있다. 내 조국 땅에서도 혀가 짧아지고, 고부라지는 세태에 일본 한 복판에서 대를 이어가며 우리말과 얼을 지켜나가는 이분들은 대단한 분이시다. 솔직히 내가 그 처지라면 도저히 이분들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삼가 고국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락을 같이한 재일동포 시인의 추모 시 한 편과 고인의 유작 한 수를 소개한다.

 

 종소리는 누가 울리라고

 

                    김두권

 

 종소리

 앞으론 누가 울리라고

 팽개치고 떠나갔단 말이오

 무슨 길이 그리도 바빠

 야속하게 떠나버렸는가요

 

 우리 비록

 현역에서 물러선 처지이긴 하지만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저녁놀은 짙어지고 있으나

 애국애족의 붓대를 높이 들자고

 뜨겁게 이야기하던 그대

 재일동포의 시인이여

 

 하여 종소리는

 탄생의 첫소리를 울렸던 것이다

 역사의 해 2000년의 새봄

 언제나 고향을 못 잊어하고

 조국을 그리워하고

 재일동포를 심려하던 그대

 

 종소리를 더 크게 울려야 한다고

 그대는 언제나 앞장에 섰다

 누구보다도 가슴 불태웠고

 누구보다도 동분서주했으며

 언제나 희망으로 빛나는 얼굴이었던

 못 잊을 그대, 민족의 시인이여

 

 뜻깊은 해를 눈앞에 두고

 더 크게

 더 멀리

 더 아름답게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바라고 있는데

 대체 그대는 어디로 간단 말이오

 

 잊을 수 없는 가지가지의 추억들

 고스란히 남겨둔 채

 자신의 몸과 마음처럼 아끼던

 종소리를 남겨둔 채

 어이 떠날 수 있단 말이오

 

 맨 앞에서

 신나게 울리던 종소리

 앞으론 누가 울리란 말이오

 

 아, 정화수 시인이여

 

 

 치마저고리

 

               정화수

 

 청자, 백자인가 일본거리에

 색깔도 연한 치마저고리들

 비둘기처럼 나란히 속삭이며 다니네

 

 서리 같은 칼날들이 노리건만

 의젓한 그 모습

 조선의 딸들이 틀림없구나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이제는

 바꾸어 입으라고 말리는데도

 갈기갈기 찢길지언정

 민족의 넋 벗을 수 없다는 게지

 

 우리 학교 다니면서 움트고 자란

 그 넋을 지켜온 귀염둥이들

 날개처럼 입고 다닌 교복이 아니냐

 

 다시는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게지

 백옥 같은 치마저고리

 먹물을 덮어쓰고

 통바지에 몸이 매여 끌려온 수난

 

 다치지도 말아다오

 잊지도 말아다오

 오늘의 괴한들이 누구의 후예인가를

 무엇 때문에 칼부림하는가를

 

 살벌을 늠름히 헤치고 다니는

 조선의 딸들아 기특도 하구나

 나는 걸음 멈춰

 뜨거운 눈길을 한참 보낸다

2010.02.02 13:13ⓒ 2010 OhmyNews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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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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