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넉넉한 뱃살과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초록색 할아버지 한 분이 TV광고에서 열심히 외치던 휘바! 휘바!와 자일리톨 껌일 것이다. 하지만 휘바와 자일리톨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나라 핀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구소련의 침략에 맞서 끈질긴 항쟁을 통해 자신들의 나라를 지켜냈던 사실에 대해서는 약간 생소하게 다가 올 것이다. 핀란드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겨울전쟁(The Winter War)"으로도 불려지는 소련의 핀란드 침공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소련의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합병
폴란드 반쪽을 손쉽게 삼켜버린 소련은 폴란드만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던지, 소련 동쪽 끝에 위치해 있던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을 총 한방 쏘지 않고 단 한번의 공갈협박으로 합병해 버렸다.
발트 3국은 공산혁명 이전부터 제정러시아의 통치를 받아오던 지역으로 1920년 러시아 공산화에 성공한 소련정부가 소수민족 회유 차원으로 잠시 동안의 독립을 인정해 주었지만, 이들 국가는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발트해와 북해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역으로 이미 독일은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소련에 대한 발트 3국의 소유권을 인정한 바 있었다.
발트 3국마저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던 소련은 그 다음 목표로 핀란드를 골라잡았다. 발트 3국과 동일하게 재정러시아의 일부였던 핀란드는 1919년에 독립한 국가로 핀란드가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은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철광석은 전쟁수행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로서 소련의 핀란드 점령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이득이 될 것이었다.
소련의 핀란드 침공과 핀란드의 분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손실계산을 마친 소련은 핀란드가 예전의 발트 3국처럼 아주 간단하게 넘어오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핀란드의 정계 인사와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던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핀란드 대통령인 '괴스터 칼리오'에게 수리사르 섬을 비롯한 4개의 섬과 핀란드 국경부근의 2,000㎢에 달하는 영토를 소련에 넘기고 동시에 핀란드 각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을 보장하라는 각서를 협박과 함께 들이밀었다.
하지만 핀란드는 발트 3국처럼 소련의 공갈협박에 순순히 넘어갈 생각이 결코 없었다. 소련의 요구는 당연히 거절되었고, 핀란드는 거대한 붉은 곰 소련과의 정면 대결을 선택하게 된다.
1939년 11월 30일 새벽을 기해 소련군은 25개 사단의 보병병력과 2400여대의 각종 전차, 그리고 2,000여문의 화포와 500여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핀란드를 침공해 들어왔다. 그 누구도 핀란드가 일주일 이상 버틸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싸움을 걸어온 소련군에 맞서야 할 핀란드군의 전력이 너무나 빈약했기 때문이다.
개인화기라고 해봐야 자국에서 개발한 '수오미' 기관단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 각 국이 고철로 매각하는 것을 사들인 것 뿐이었고, 전차라고 해 봐야 폴란드에서 사들인 구식전차 1개 중대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에 처해있던 핀란드군은 북극권의 혹한과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단련되어온 30만의 정예병력과 구스타프 폰 만네르하임(Carl Gustav von Mannerheim)원수가 버티고 있었다.
핀란드가 제정러시아 왕국의 일부였던 청년 시절에 황제 '짜르'의 근위기병대에서 근무했던 장교 출신으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만네르하임 원수는 러시아인의 생리와 전술에 정통해 있었던 지휘관으로서 핀란드 국민과 군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핀란드의 실질적인 국부였다.
2010.02.06 16:35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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